예수의 성욕 논쟁/ 박영돈-신동준

by dschoiword posted Mar 3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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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성욕 논쟁


1. 박영돈의 문제 제기


낸시 랭의 신학 펀치를 보고 느끼는 아쉬움


오늘 처음으로 신학펀치라는 CBC 프로그램을 보았다.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심에 대해 논의하는데 교의학자로서 듣기에 아슬아슬하고 위험스러운 대목이 많았다. 한 교수는 예수님이 광야시험을 당하시면서 사단이 유혹한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천하만국을 소유하고픈 불순종의 욕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욕망이 전혀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진정으로 시험과 유혹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야한 생각을 하고 몽정을 했겠느냐는 낸시 랭의 엉뚱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 교수는 주저 없이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가 예수님의 인성을 전문적으로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대중을 상대한 가벼운 신학적 담화에서 던진 그 교수의 몇 마디 말을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중대한 진리에 관해 언급하면서 좀 더 사려 깊고 신중한 발언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죄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시다. 히브리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했다(히4:15).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죄의 근원과 좌소는 마음이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야한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그 분도 이미 마음으로 간음의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야한 생각이란 단순히 여인이 아름답다거나 섹시하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고 싶다거나 성적인 행위와 관련된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몽정을 하는 것은 대개 꿈속에서의 성행위에서 기인된다. 구약 율법에서는 몽정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몽정은 잠재의식 속에 억눌려있는 성적 욕망의 표출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예수님이 사단이 유혹한 대로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발언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큰 실언이다.


죄의 근원은 불순종의 욕망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다(약1:15).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불순종의 행위만이 아니라 불순종의 마음, 욕망이다.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 혹은 품었다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는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면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약함 가운데 처절한 배고픔을 견디며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에게도 똑같이 사단의 유혹이 엄습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그 유혹에 끌려 불순종의 욕망을 품게 되었고 그 욕망과 예수님이 치열하게 싸우셔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죄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죄와 사탄의 유혹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불순종의 욕망을 품는 자체가 죄의 근원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가. 가장 거룩하신 분에게는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거역하라는 사단의 사악한 유혹과 암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었던 것이다. 불순종의 죄를 밥 먹듯 범하는 죄인들에게 그런 유혹은 아무 괴로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유혹이 달콤할지 모른다. 그러나 죽기까지 하나님을 순종하신 그 분에게 그 하나님을 반역하라는 마귀적인 음성은 그의 마음에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다. 그 분을 하나님이라는 렌즈로만 바라보므로 예수님의 온전한 인간됨의 면모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으면서도 다른 분이시다. 죄로 말미암아 속속들이 부패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의로우신 분이다.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오염되고 뒤틀린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 마음의 모든 생각과 욕망과 상상까지 죄로 오염된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성령으로 성화된 죄 없는 인간성과 청결한 심령을 가지신 분이다. 아직 부패성이 남아있는 우리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해도 야한 생각이나 욕망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항상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이셨던 그 분을 야한 생각과 욕망이나 품고 사는 우리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사람 되심을 곡해하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골2:9). 그 분은 인간으로 존재했던 모든 육체의 때에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 않은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분을 부패한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의 비정상적인 인간성을 그 분에게 그대로 투사해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은 그 분의 죄 없으심과 그 분의 신인되심을 부인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2천년 교회 역사 속에 우리의 신앙선진들이 치열하게 고민하여 연구한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존중이라도 가져주면 좋겠다. 또한 내시 랭의 신학펀치가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에 대해 논의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페북에 실린 글)


2. 신동주 피디의 반문



박영돈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CBS 기독교방송에서 <낸시랭의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신동주PD라고 합니다. 작년 연말 교수님께서 쓰신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 읽으며 많은 감동 받았던 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책으로, 또 페북 상에서 좋은 글로, 우리 사회와 교회에 유익을 끼쳐주심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박교수님이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10회 ‘예수님은 백 퍼센트 인간이었나요?’를 보고 페북에 올리신 글을 읽고, 저 또한 느낀 점을 나누고자 한 명의 기독인 자격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교수님과 또 시청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건 이런 것들입니다.


1) 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


저희 프로그램에선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실제로 그 시험의 ‘내용’에 대해 유...혹을 느꼈다고 소개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고 싶은 욕망(돌과 떡), 사탄에게 절을 하고서라도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높은 산과 만국의 영광), 하나님을 시험해서라도 멋진 것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이 예수님 안에 어느 순간 있었다고요. 그 욕망은 – 만약 실천했다면 ! –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욕망이었다고요. 네, 저희 프로그램에선 그런 욕망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교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시며 “그 욕망과 예수님이 치열하게 싸우셔야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죄에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기 문장을 읽고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알던 성경 상식 – 네, 저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신자로서 제게 있는 신학적 지식은 상식 수준에 가깝습니다 – 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안에는 ‘나의 원(실천하면 불순종에 이르고)’과 ‘아버지의 원(실천하면 순종에 이르는)’이 둘 모두 동시에 존재했던 게 아닌가요? 그 둘이 “치열하게 싸웠던” 게 아닌가요? 그 싸움이 너무나 치열해서 피와 땀을 흘리셨고,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고백하신 게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예수님이 극심한 갈등을 겪었기에 – 교수님의 지적대로 - 이미 죄에 굴복하셨다고 봐야 하는 건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욕망과 기도는 둘 모두 극히 실제적이었고 치열했으나 죄는 짓지 않으셨다. 이것이 제가 이 본문과 기타 시험을 읽는 독법입니다. 그리고 저희 프로그램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2) 야한 생각에 대하여


만약 저희 프로그램에서 “예수님도 <음욕을 품었을까요>?” 라고 물었고, 거기에 대해 “모든 인간들처럼 예수님도 <음욕을 품었다>”라고 답했다면 저희 프로그램,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 제가 믿는 예수님은 - 박교수님이 믿는 예수님처럼 - 음욕을 품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저희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혹시 누군가 하면, 아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한> 생각은 어떨까요? ‘야하다’는 말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여고생들도 “오늘 내 치마 좀 짧지 않니?” 라는 말을 “나 오늘 야하지 않니?”라는 식으로 종종 표현합니다. 야하다,는 단어를 <침대 위에서 땀 흘리며 행하는 성교>로만 해석한다면, 저도 박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하나, 야하다는 말을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과 연결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때도 있고,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맘에 맞는 동료와 함께 “밝고 빛나는 야한” 대화를 나눌 때도 있습니다. (오래 나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대화는 짧고 그리고 밝은 웃음으로 끝난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를 행할 때 저는 회개하고, 후자를 행할 때는 예수님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전자에 대한 강조는 차고 넘쳤습니다. (그 결과는 초라하지만요).


후자에 대한 표현, 표출, <찬양>(물론 주님께) 도 함께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일 먼저 교회에서! 그래서 소위 ‘기독교’ 프로그램에서 물었습니다. 예수님도 야한 생각을 하셨나요? 몽정도 하셨나요? (저라면, 예수님도 새벽에는 발기 하셨겠죠, 라는 질문도 추가했을 것 같습니다.) 아! 시험을 겪으시고, 발기를 경험하시고,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죄는 짓지 않으신 한 남자를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께 모든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인성과 신성을 더 알게 되기를!


3) 중대한 교리에 대해


박교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아래 말씀을 읽으며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또한 낸시랭의 신학펀치가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에 대해 논의하기에는 부적합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박교수님.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를 논할 수 있는 “중대한 자리(장)”가 과연 따로 있나요?


중대한 교리에 대해 솔직하고 겸손하게 묻는다면 그 장소에 상관없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혜를 주시는 게 아닌가요? 예수님이 진정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신 곳은 회당이 아니라 우물가였습니다. 기독교의 중대한 교리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곳이 어디인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궁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길 찾아올까? 혹 찾아오더라도....물을까? 신학을 한다는 것, 교회개혁, 성화 등등 박 교수님의 좋은 글들 페북에서 매번 읽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저희 프로그램,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주제나 방향성 등에 대한 조언해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달을 앞두고 있는데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014. 3. 27. 신동주 드림


3. 박영돈 답신


낸시랭의 신학펀치를 보고 느낀 아쉬움에 대한 신동주 PD 님의 답 글에 대한 답신 글 잘 읽었습니다. 시청소감을 한마디 하고 말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또 글을 올리게 됨을 양해해주세요.


1) 먼저 보내주신 답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예수님이 불순종의 욕망과 싸우셨다는 주장을 변론하기 위해 매우 부적절한 비유를 드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신 것에 근거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예수님 안에 사단이 유혹한 불순종의 욕망이 있었고 예수님이 그 욕망과 치열하게 싸웠다고 보는 것은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공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신 것은 마귀가 제안한 신성모독적인 욕망과는 완전히 상충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으로부터 옮겨달라고 하신 ‘잔’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말세에 악인들에게 쏟아 부을 진노의 잔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악인들을 대신해서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잔을 찌끼까지 남김없이 마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버림받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끊어지기를 원치 않는 아들의 간절한 소원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아들의 말할 수 없는 심적 고뇌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마 26:38) 하셨고,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인간의 연약한 육신이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내적인 진통을 겪으셨습니다(눅22:44). 거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맛보신 헤아릴 수 없는 심적 고통의 극치를 엿보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구약 선지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그 죽음의 패션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의 잔을 받아야 할 고난의 순간을 목전에 두고 그렇게 고뇌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참된 인간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원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원하는 아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는 불순종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한순간이라도 분리되지 않기를 원하는 의로운 갈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가지는 정당하고 거룩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정당한 소원까지도 포기하시고 자신을 버리시는(매우 부당해 보이는) 아버지의 가혹한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저주하시면서 까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앞에 자신에게 임할 진노의 잔이 옮겨지기를 바라는 의로운 소원까지도 결국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 안에 있었던 불순종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이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 즉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것까지 감수하시는 그 분의 죄인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밝히 드러나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주님의 자발적인 순종의 클라이맥스가 극명하게 계시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끊어지는 길 외에 아버지의 다른 뜻이 혹 있는가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이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고 기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눅22:42). 만일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거든 허락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주님의 뜻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길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 분은 절박하셨고 그 진노의 잔은 받기를 인간적으로 두려워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이런 갈등이 없었다면 주님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고난의 심연을 헤아리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대목을 우리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내적인 갈등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오독한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원함을 마귀적인 욕망, 즉 사탄에게 절을 하고라도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고 싶은 욕망, 하나님을 시험해서라도 자신을 과시하고 입증하려는 욕망과 같은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해석입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반역하는 마귀적인 욕망과 갈등했다는 말씀이나 암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간교한 유혹과 암시를 단호히 물리치셨지, 우리처럼 우리 안의 부패한 욕망과 씨름하며 고뇌하며 미적거리는 순종의 길을 가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광야의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하심으로 첫 사람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마음이 꾀어 실패한 시험과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순종하므로 실패한 시험을 확실히 만회하심으로, 많은 불순종의 종들을 대속할 완전한 순종의 종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들 안에 있는 왜곡된 본성과 욕망으로 인한 갈등을 주님의 경험에 무리하게 투사하여 성경본문에서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에로틱한 상상을 기발하게 비약하여 고안해내지 않는 한, 복음서에서 주님이 부패한 욕망과 갈등했고 야한 생각을 했다는 말씀이나 암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죄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마음에 불순종의 욕망을 품었다는 자체가 곧 죄의 근본입니다. 주님 자신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야고보도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면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하여 그 분은 이미 죄인이 되신 셈입니다. 만약 신 피디님이 그런 의미로 말하려던 것이 아니라면 내 글에서 언급한 대로 다른 방식과 논리로 표현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민감한 진리를 다룰 때 신중함과 신학적인 자문이 필요합니다.


2) 주님이 야한 생각을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도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신 피디님은 주님이 음욕을 품었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고 변론하시며, 야한 생각이 의미하는 바를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 “밝고 빛나는 야한” 이라고 매우 우아하게 그 뜻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시청자 중에서 야한 생각을 그렇게 이해한 이가 얼마나 될까요. 공중파 방송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대중이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과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요. 물론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스펙트럼은 넓을지 몰라도, 시청자 중 거의 대부분은 불건전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 말이 그런 고상한 의미보다는 영화의 야한 장면이라든가, 야한 동영상이라는 표현으로 더 널리 통용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 고상한 뜻을 의도했다면 그런 의미가 시청자들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셨어야지요. 주님이 “건강하고 밝은 성적 생명력”을 가졌던 분인가 또는 주님이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가졌던 분인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랬다면 이런 논란의 여지가 없었겠지요. 비록 대중을 끄는 흥미를 유발하는 데는 아주 맹탕이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뜻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고 오해의 소지만 다분한 표현을 사용하시고는, 뒤늦게 그런 식으로 생소한 뜻풀이를 하시는 것은 궁색한 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더욱이 주님이 불순종의 욕망을 가졌다는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질문이니 더욱 그렇게 이해하기가 쉬웠지요. 주님이 보편적인 불순종의 욕망을 품었다면, 당연히 음란한 욕망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자연히 주님이 야한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런 의미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자신을 입증하고 사단에게 절해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고 싶은 불순종의 욕망까지 가졌는데 음욕이라는 불순종의 욕망만은 없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옹색한 논리가 될 것입니다. 3) 요즘 들어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곤란을 당하는 일인지를 더욱 절감하기에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몇 가지 느낀 아쉬움을 적어본 것입니다. 아주 민감하면서도 기독교의 핵심 되는 중대한 진리를 다루는 데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접근이 필요한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기독교 진리와 신학을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는 취지는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위험부담 또한 크다는 것도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공중파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대중성의 확보와 시청률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게 되어 대중의 기호와 취향에 맞추다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대중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벼운 담소거리로 상품화되기 쉽습니다.


기독교 TV방송까지 상업주의 스피릿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일반 TV 방송 시청자들도 드라마와 프로그램을 모니터하며 더 좋은 방송을 위한 조언과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주님과 교회의 얼굴을 드러내는 기독교 TV 방송을 보면서 건전한 발전을 위한 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방송사가 복음의 진리를 증진시키기보다 훼손하는 것을 막는 방어기제가 교계에서 작동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방송 담당자들은 시청자의 비판의 음성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잘못된 의도가 없을지라도 많은 시청자에게 여러 가지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면 사과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심히 부족하지만 약간의 전문 지식을 가진 신학교수가 수많은 교인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문제의식을 대변해주었을 때, 그 지적을 귀담아 듣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발전과 이미지 개선에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프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한동안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모르나 점점 교인들이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건강한 방송으로 도약하기를 소원합니다.


박영돈 교수, 2014.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