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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hoiword2015.04.15 17:14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박성은 (박윤선의 아들)  1


<기독개혁신보> (2015.3.31.)

< 박성은 박사, 캘리포니아대학 교수 >

<필자 박성은 / 박윤선 목사의 4남으로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M.D.), 웨스트민스터신학교(캘리포니아)에서 M.A.R.를 받고 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I) 의대 임상 부교수,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서 통증의학 및 신경내과 병원 운영. 캘리포니아 Beuena Park 나침반교회 자원봉사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당신은 진정한 개혁주의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깊이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혜란 누님의 글을 보셨다 하더라도 훼손에 대해선 그다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 기준으로 자상하고 상세하게 또한 방법론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지는 못하셨다 해도 늘 단순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대해주셨던 모습, 오늘 따라 너무 그리울 뿐입니다.”

아버지, 지금 얼마나 기쁘고 좋으십니까? 저는 아버님 살아 계실 때 당신 밑에서 신학 수업은 못해서 한이 맺히긴 하였고 또 안수 받은 목사가 되지 못해 훌륭하게 설교자로서 직접 강단에서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선 목회자가 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터, 즉 환자를 보면서 때에 따라 눈물로 기도도 해주고, 의심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변증적으로 가르치고, 확신을 주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하며 권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목회자나 신학 교수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려 보지만, 그래도 전 제가 하는 이 일에 적지 않은 기쁨을 가집니다. 

단순한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당신의 온 삶의 열정을 당신이 “당신님”이라고 특별히 불러드리는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성경에 쏟으신 것을 저는 어릴 적부터 알았습니다.

당신은 항상 두툼한 손가락으로 낡은 가죽 덮개로 된 온갖 가장자리에 간단히 코멘트를 써놓은 너덜너덜한 성경을 손에 쥐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던 파카 만년필로 된 굵은 글씨로 이곳저곳으로 선을 그어가면서 읽고 계셨죠. 때로는 조용한 소리를 내시면서 읽다가, 원고지에 굵은 글씨로 몇 자 적으시다가, 성경 원어를 찾고, 또 다른 서양 주석가들의 주석들을 펼쳐보시고 조용히 웃으시곤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 어머님의 잦은 주의대로, “아버지는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바친 분인데, 내가 아버지 대접하려고 놔둔 것 건드려선 안 돼. 너희들도 커서 아버지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냐!” 하시면서 당시로선 조금은 싫증나도록 저희들을 다독이시던 것 기억합니다. 저희들은 아버지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그런 단순한 아버지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좋아했으니까요.

당신은 평생 저희들의 옳지 못한 행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교단적으로도 자녀들의 일로 많은 노고를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생명을 걸고 외치던 “교회끼리 소송은 안 됩니다”라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던 분들이 “자기 아들이나 잘 다스리라고 해!”라며 당신의 형님들의 비행까지 들고 나와서 강단에서 비평할 때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으셨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그런 형님을 끝까지 도우셨고 위해서 끝까지 기도하시다 가셨죠. “기도는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뤄져!”라고 하시면서요.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의 말씀이 맞았어요. 형님 세 분 다 참신한 신자로 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요.


저희가 어릴 때부터 당신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당신을 재정적으로 도와 공부하게 했던 몇몇 미국인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가정예배 때도 기도하셨고 또 성탄절 때마다 카드를 보내셨습니다. 특히 Bouley(“뻘레이 할머니”) 여사는 그녀가 70년대 초반쯤 세상 떴다는 말을 들으실 때까지 계속 기억하시고 기도하셔서 우리는 그분이 누군가 하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은 용기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당신은 선교사들을 그리도 사랑하셔서 당시 전후 복구를 위해 여러 해 봉사하고 가는 출항 스케줄 상 주일 아침에 본국을 향해 홀로 영구 귀국하는 스푸너 선교사를 그냥 돌려보내기가 너무도 안 되어 “나라도 가서 꼭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곤 당시 경직했던 고려파의 신학 교육 수장으로 있음도 마다 않고 본국으로 떠나는 스푸너를 위로하러 급히 주일 아침 시발택시를 잡아타시는 것을 어머니 손을 잡고 봤습니다. 바로 신학교 사택 앞이었죠. 그 후 저는 잘 몰랐는데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더군요.

전 당신의 용기와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으신 아버님 당신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후에도 아버님은 주일 성수에 대해서도 어머니와는 다르게 이런저런 권면은 많이 하지 않으셨고 주일은 예배에 집중하라고만 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주일 설교 마치시고 오후 서너 시간 편히 쉬시면서 저희더러 손발 좀 주물러달라고 하시곤 하셨던 것 저희들은 기억합니다.


선교사들의 노고를 늘 생각하셔서 당신의 생일에는 늘 한국 주재 선교사 가족들을 집으로 대거 초청하시곤 해서 어머니께서 교회 요리 잘 하시는 집사님들을 불러 모으시던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 당신은 말씀은 별로 많이 하시지 않았지만 정말 이해심 많은 분이셨다고 저는 자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70-80년대에 장발로 다닐 때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 깎으라’고 하셨지만 당신은 대체로 침묵하시다가도 가끔 “그거 아이들 요즈음 추세인데 그냥 두라우. 당신 말대로라면 나도 지금 상투를 틀란 말이요?”라고 하시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곤 하셨죠.

당신은 우리가 가족끼리라도 모였을 때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그들의 성취에 대해 조금이라도 폄하하는 말을 할 때면 늘 우리를 경계하신 것으로 우리 모두 기억합니다. 정말 아버지가 옳으셨어요. 제가 곁에서 봐도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말을 하신 기억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면 냄새 나서 다 도망가 버릴 거다”

아버지 당신은 진정한 개혁주의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 깊이 느끼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지금 살아서 혜란 누님의 글을 보셨다 하더라도 당신 자신의 명예 훼손에 대해선 그다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내가 그랬지 않았는가? 당신들 누구라도 나하고 삼일만 가까이 있어보고 특별히 내 속에 들어와서 내 생각을 들여다본다면, 냄새 나서 다 도망가 버릴 거라고 말일세. 사실 난 내 딸 혜란이가 말한 것보다 더 나쁜 놈이라오”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늘 인간의 죄악상에 대해 뼈저리게 일러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예배 시간에 어린 저희들에게도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신뢰할 바가 아니고 사랑할 바라”고도 말입니다. 인간은 의롭다고 칭해진 것이지 의로운 것이 아니므로 계속 성화해 나가야 한다는 개혁주의 진수에 충실하셨고, 인간이 아무리 악을 행해도 안타까워는 해야 하겠지만, 놀랄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울 신학에서 악한 생각을 도모하는 인간을 헬라어로 ‘삵스’로 표현하였으며 단지 신체적인 몸을 뜻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구분해서 말한 부분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물론 이 부분은, 흑백 논리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정암이 인정하는 대로, 바울이 두 단어를 기계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혼용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확실한 것은 정암은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죄로 향하는 몸’(‘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롬 8:6)을 말할 때와 ‘중성적 의미로서 몸’(‘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에서 말하는 ‘몸’과는 날카롭게 구분하시곤 했다.]

제가 “아버지, 난, 교회에서 녹을 받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할 거예요!”라고 말한 적을 기억하십니까? 그러자 아버님은 저의 교만한 마음을 걱정하시면서, “너 사람이 원래 다 진흙인줄 모르네? 사람은 자기가 뭘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돈을 받아도 별 것 아니고 안 받아도 대단한 것 아니다. 사람은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책임을 지는 것이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 두 가지 다 잘하기 어렵다! 너무 장담하지 말아라. 겸손해라”라고 저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

아버지, 당신은 소시 때부터 동양철학에 심취하시고 대학 중용 시경 서경 등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섭렵하셨고, 또한 유교의 이단설이라 말씀하시며 장자나 노자에 대해서도 가끔 가정예배 때 인용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놀랍게 당신은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항상 짙은 스킨십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함께 만들어낸 애칭을 자식들과 쓰기도 하시며(예를 들어 막내아들을 ‘거북님’이라고 부름) 우리로 하여금 거의 버릇없는 자식같이 만드신 당신. 식사하실 때 옆에서 함부로 눕곤 하면, 어머니께서는 “어른 식사 하시는데 누워있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지, 당신은 별로 관계도 안하셨고 허례허식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차리지 않으셨던 당신. 며느리나 딸과 차의 뒷자리에 동석하시면 항상 그들의 손을 깍지 끼어 잡고 계시던 당신. 비록 세상적 기준으로 자상하고 상세하게 또한 방법론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지는 못하셨다 해도 늘 단순하고 진실하게 우리를 대해주셨던 모습, 오늘 따라 너무 그리울 뿐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권위에 대하여 성경적 진리를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동양철학을 하신 당신은, 지나친 것들은 성경적 원리에 의해 제거해야 되지만, 일반은총의 깨달음에 의한 동양적 윤리에서도 배울 것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정예배 시에 말씀하시던 것들 중, “부모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 세상에서는 다른 어떤 권위보다 더 깊은 권위를 소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양 윤리에서 말하는 “부모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온유와 울음으로 손을 붙들고 호소할지언정 부모에게 고함지르고 험한 말이나 혈기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유교적 진리는 그 자체로선 구원은 못 주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건질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의 부모를 생각해서, 부모의 자식인 동생을 자신의 아들보다 항상 먼저 위험에서 건져야 한다”는 유교적 윤리는 지나치다고 하시며 잘못된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셨습니다(필자는 여기서 정암이 한 말은 분명히 기억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어디서 정암이 그런 글을 인용하셨는지 아직 찾아 봐야 합니다.) 참 균형 있는 좋은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항상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에서 권위를 가지듯, 우리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육신적 이유가 되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그 점에서 특별히 가지는 부모의 권위도 무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너무 와 닿는 이 시대입니다.


당신이 바치신 삶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박성은 2

<기독교개혁신보> (2015.4.15.)


< 박성은 박사, 캘리포니아대학교수 >

 

"딸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고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신학교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항상 돈을 빌리러 다니던 계모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누님에 대해서는 갸우뚱 할 따름입니다."

    

"참 진리가 다수결에 의해 몰락되고, 비진리가 군중에 의해 진리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선 기꺼이 고난도 감수하던 당신의 외침은 가슴 벅찬 메아리로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버지, 외국 생활을 많이 하셨던 당신은 영성이 메말라가는 서양 신학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동양 철학과 성경을 비교하여 성경의 탁월성을 드러내고 또한 서양 신학이 잊어가는 성경의 가르침을 당신의 잠언 주석을 통해 영미에 소개하려는 뜻을 가지셨음을 기억합니다.

 

항상 권위주의를 배격하셨던 아버지

 

당신이 가졌던 더욱더 방대하게 동양윤리의 옳고 그름과 또한 성경적 윤리관에 비해서 탁월치 못함을 드러내시길 원하셔서 한동안 잠시 그런 계획을 가지셨으나 일의 어려움을 아시고 접으셨지요.


수많은 성경주석을 접한 당신은 당신의 주석이 누구보다 우수하다 고집하지 않으셨음도 저는 압니다. 누가 무슨 악한 말로 오해를 하고 악한 말로 뒤집어 씌워도 그저 침묵하고 정진하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권위주의는 항상 배격하셨음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자들이 설교할 때도 항상 앞에 앉으시고 자주 필기도 하시곤 했습니다. 제자 목사님들이 와서 세배를 할 때도 대부분 함께 맞절을 하시는 때가 많았고, 거의 대부분 손자 벌 되는 신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쓰시는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교회에서 외식주의와 종교적 권위주의를 배격하려고 목사 가운도 입지 말라고 하셨고 그저 겸손히 은사에 따라 봉사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했음을 저희들 모두 잘 기억합니다. 또한 일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목사는 항상 보따리를 싸고 목회를 해야 하며 목사도 다른 장로와 함께 임기제로 해나가라고 힘든 주문을 하셨음을 압니다.

 

우는 소리로 기도하셨던 아버지가 이해됩니다

 

제가 아주 너댓 살 때에도 자주자주 술 취해서 밤에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주정하던 큰 형님 때문에 무던히도 울며 하나님께 간구했던 당신은 어린 제 눈에도 이상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술주정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돕는 가까이 거주하는 신학교 학생들은 술 취한 형님을 일단 안정시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붙들어 묶곤 하였고, 언젠가 비가 오는 한밤중에 술에 취한 형님을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인데, 아버지는 형님의 머리가 땅에 닫지 않도록 하게 하려고 손수 방석을 가져다가 형님의 머리 밑에 놓아두시던 것을 어린 제 눈으로 본 기억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실까 했지만, 다윗의 용서와 사랑을 배신하고 심지어 아비의 부인들을 겁탈했던 압살롬의 죽음을 애곡으로 반응했던 다윗에 대하여 읽고 이해했습니다. 당신의 기도대로 그리고 당신이 항상 하신 말씀대로, ‘기도는 죽은 다음에도 이루어져라고 하시던 말씀대로 큰 형님은 그의 말년에 저희 어머니 자식들과 가깝게 보냈고 그가 소천하기 전 후모가 계신 양로병원에 와서 엎드려 절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곁에서 수십 년 주석을 받아 적었던 딸 같은 비서에게(실제로 아버님이라 불렀음) 물건을 건넬 때도 책에다가 얹어서 주셨고, 그의 팔십 생애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남녀유별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전 어머님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싶어서 몰래 등에 업고 학교로 데리고 가셨던 당신, 또한 당신보다 십 수 년 연하였던 어머니에게도 늘 존대를 하셨던 아버님에게 폭력을, 더군다나 습관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는 자녀를 가지셨던 당신은 정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기 아버지를 온 천하에 대고 폭언과 거짓으로 매장하는 딸을 둔 것 하나만으로 당신은 놀라운 삶을 사신 분이 확실합니다. 딸의 대학 등록금을 대느라고 제 달 제 달 나오지도 않는 신학교 월급으론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아 항상 돈을 빌리러 다니던 계모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누님에 대해서는 갸우뚱 할 따름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시대적 그리고 가정적 상황에서 그것들을 극복하고 주석을 쓰시려고 할 때에는 한 가지 일에 초인적 집중력을 아버지처럼 구사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어린아이와 같이 울면서 아침마다 긴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자주자주 매우 안타까워서 견디기 어렵다고 하나님께 토로하셨습니다. 그리곤 가까이 다가가서 당신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면 온갖 자세한 도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어린 저도 듣곤 했습니다. 이제야 저는 왜 아버지가 그토록 안타까워 견디기 어렵다는 말을 하나님께 자주 하셨는지 이해가 조금은 갑니다. 그 목소리는 늘 반쯤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러심에도 저희들더러 기도를 꼭 길게 해야 한다느니 왜 기도생활을 그 정도로 하느니 하시는 말씀은 별로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만 아주 가끔 하셨습니다. (겨울엔) 항상 두터운 옛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입던 두껍고 누런 털 달린 오버코트를 입으시고 두터운 스펀지 방석과 성경을 옆에 끼고 하루도 빼지 않고 뒷산으로 기도하러 오르내리셨던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늘 하얀 손수건을 꾸깃꾸깃 주머니에서 꺼내서 코를 풀곤 하셨지요. 늘 기도할 수 있는 뒷산이 있는 곳에 집을 구하려고 어머니가 노력하셨지요.

 

당신이 바치신 그 삶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개혁주의자셨던 당신은, 구약의 모든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덕만으로 우리 신자에게 구원은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을 받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정점적 완성(consummation)은 되지 않았기에, 아직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과 악한 경향을 향해 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항상 당신은 설교에서, “신자의 평안함염려하지 말라는 설교를 수도 없이 하셨으나, 또한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4), 또한 내 몸을 처 복종케 함은”(고전 9:27)이란 말씀도 많이 하셨지요. 당신의 그러한 가르침을 아들은 신학교에서 뒤늦게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의 원리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고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면서도, 또 한편 영적 전쟁(warfare)을 위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6:17)도 간단없이 강조하셨습니다. 정말이지 당신이 추구하던 개혁주의는 위클리프와, 루터, 칼빈, 그리고 바빙크와 워필드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려 전한 복음으로 한국 땅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수적 부흥도 했지만, 아직도 복음의 씨앗이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한 조국을 많이 염려하셨음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딱 거져 카톨릭같이 되어 가누나!” 하시며 복음이 삶으로 연결되지 못함을 염려하셨고 많은 교인들이 구경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는가라고 근심하시곤 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그 후에도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강단을 많이 생각하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강단의 말씀 사역의 부흥을 생각하여 온몸을 던져 불태워 성경주석을 쓰신 것을 이 아들은 지켜봤습니다. 소풍 한 번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미국을 수도 없이 왕래하셨지만 그 흔한 국립공원(national park) 한 곳도 가 보지 못한 당신은 그저 사명에 몰두하여 사시다 가셨습니다.


당신의 뇌리에는 그저 강단, 성경주석, 그리고 신학교밖에 들어 있지 않았음을 잘 압니다. 비행기를 타도 주석 원고를 손에 드시고, 어디서 누구를 기다려도 돌아앉아 주여 주여하시며 기도하셨던 당신을 언짢게 생각하며 균형이 없는 지도자, “치우친 삶,” “하나밖에 모르는 분이라며, 지금 좀 풍요로워진 위치에서 괴이한 눈초리로 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그런 당신이 그립고 그렇게 바쳐진 삶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나에 올인하지 않는 삶으로는 적은 성취도 가능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늘 진리 편에 서라하셨던 당신은 순수한 복음 진리 때문에 많은 오해도 받으시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셨음을 압니다. 90년 전 보장된 교수직과 큰 교단의 이점을 포기하고 조그만 신학교를 세워 진리 운동을 주도하던 G. 메이쳔 박사, 그리고 보장된 노후를 마다하고 새로 시작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참여하셨다가 1년 후 폐렴으로 소천한 프린스턴신학교의 구약학 전설,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박사, 그리고 존 머리 교수,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 모두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음을 저는 압니다.


또한 당신은 그들이 결코 분열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변호하시며, 강단이 두 쪽 나도록 내리치며 절절히 외치던 당신의 사자후의 설교가 유독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분열주의자란 말도 때론 감수해야 한다고 외치시던 당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유독 듣고 싶은 때입니다.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선 고난도 감수해야 된다고 단호한 자세로 일러 주시던 쉰 목소리가 많이많이 생각나는 때입니다. 참 진리가 다수결에 의해 몰락되고, 비진리가 군중에 의해 진리로 둔갑하는 이 시대에, 당신의 외침은 가슴 벅찬 메아리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사역에 사활을 건 기도

 

저는 지금도 아버지 당신의 기도 소리를 아침마다 곁에서 듣는 듯합니다. 당신의 생의 말기에, 80을 바라보는 시기에, 젊은 네 교수님들과 손잡고 신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셨습니다. 맨땅에서 선지학교를 시작하신 것이지요. 이제 갓 시작한 신학교는 모든 것 하나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진리를 사모하여 모여든 많은 젊은이들과 꿈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시는가 했습니다.


허나 당시 고등교육의 질적 퇴락을 염려한 정부의 강경책으로 신학교 인가라는 문제로 당신은 날마다 눈물로 주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학생들의 학문적 미래와 또한 그들의 졸업 후 사역을 위한 학교의 위상을 위해 고등교육기관 인가는 모든 분들과 뜨거운 기도의 제목이었음을 잘 기억합니다. 당시로선 불가능하다했던 새 신학교 인가 문제는, 당신을 여윈 얼굴로 빈방에 홀로 앉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도록 했었지요. 당신의 마지막 사역의 사활을 건 기도였습니다.


당시 이미 당당하게 인가받아 있던 몇몇 신학교에 버금가는 위상을 남겨줘야 하겠기에 당신은 교수님들과 또한 교회의 어른들과 기도로 해결하기로 작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적으로 열매를 보게 되었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특별히 금식 후 죽을 드시는 당신의 까맣게 타고 초췌해진 얼굴의 미소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이십니다

 

기도는 물론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아름답고 귀한 대화이니 모든 언어는 기도를 위해 있다고 말씀하신 당신은, 또한 기도가 영적 전쟁이기에 죽기내기로 시간을 확보하고, 죽기내기로 집중하고, 죽기내기로 우선순위를 바로 잡지 못하면 진정한 기도생활이 되지 않는다고 귀가 닳도록 역설하셨지요. 우리의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싫어도 진액을 짜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아직 성화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우리는 기도에 게으르고, 기도가 정욕으로 흐르고 성의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시며 기도가 싫을수록 기도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당신은 기도를 똑똑한 정신으로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다 동원해서 하라하셨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짓지 않”(삼상 12:23)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바쳐 넣어야 된다고 하셨지요. 결코 고행주의자도, 자학주의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니셨지만 기도와 성결을 향한 고난은 당신의 설교의 주된 테마였으며 당신의 삶의 징검다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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