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 후예들

by dschoiword posted Dec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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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후예들

 

국민일보 (2018.9.5.)

 

저항과, 기억

 

초기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 후예 1만여명이 지난 2일(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앙뒤즈 지역 야외 언덕에 모여 ‘사막 집회’라는 이름으로 예배를 드렸다. 프랑스 전역을 비롯해 주변국가에 흩어져 살던 후손들은 매년 9월 첫 주일이면 어김없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조상들의 고난과 신앙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날 20m 높이의 나무 숲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가족이나 친척별로 모여 앉아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 앞서 10여명이 세례를 받았고 예배 후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했다. 1만여명이 강단 앞으로 걸어나와 성찬에 참여하는 모습은 프랑스 개혁교회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한 참가자는 “이 집회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리는 모임”이라며 “우리는 선조들의 아픔을 기억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 곳은 과거 위그노들이 믿음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됐던 고통의 현장이었다.

위그노는 한국교회엔 낯선 이름이다. 종교개혁사에 등장하지만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후손의 규모가 얼마나 되고 현대 프랑스 개신교회가 어떻게 선조인 위그노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전문가 외에는 앙뒤즈를 방문하는 일도 드물었다. 앙뒤즈는 과거 위그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그들의 신앙 유산을 담은 유적들이 보존된 지역이다.

위그노는 장 칼뱅의 개혁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종교개혁의 주장이 팸플릿이나 기도 책자로 프랑스 전역에 보급됐는데 위그노들은 이를 읽고 토론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벽보사건’은 그들이 얼마나 선명한 개혁신앙을 소유했는지 알 수 있다. 가로 37㎝, 세로 25㎝ 크기의 종이 위에는 고딕체 프랑스어가 쓰여 있었는데 그 내용은 4가지였다.

첫째, 신부가 마치 우리의 구속자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해 제사를 드리는 미사는 신성모독이다. 둘째, 성찬 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 안에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하는 성경 진리와 배치된다. 셋째, 그러므로 이 화체설은 악마의 교리다. 넷째, 로마 가톨릭의 성찬은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찬의 열매와 정반대다.

1534년 10월 24일 프랑스 파리 전역에 붙은 이 벽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와 교황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벽보는 심지어 당시 프랑스 왕인 프랑스와 1세의 침실에까지 붙으면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었다. 가톨릭교회는 분노했고 국왕은 권력 유지를 위해 대대적인 반개신교 정책을 단행했다.

이때 칼뱅은 프랑스와 1세에게 개신교인을 변호하는 강력한 글을 작성하는데 그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였다. 칼뱅은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난민으로 살며 고국의 개신교인들을 다양한 조언들로 격려하고 신학 서적으로 지원했다. 제네바아카데미를 세우고 신학생들을 훈련해 조국으로 파송했다. 그때 칼뱅이 했던 말은 유명하다. “나에게 통나무를 달라, 화살을 만들어 보내겠다.”

개신교인들은 ‘사이비 신자’로 매도돼 체포됐다. 옥에 갇혔다 처형을 당했고 박해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다. 낭트칙령으로 잠시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태양왕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철회하면서 개신교도의 종교적, 시민적 자유는 완전히 박탈당했다. 목회자들은 15일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비폭력으로 버티던 위그노들이 ‘카미자르’라는 저항군을 조직해 맞선 것도 이때였다.

칼뱅이 신학교를 세워 ‘화살’을 만든 것도, 위그노들이 카미자르 특공대를 조직한 것도,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이런 저항이 있었기에 위그노 정신은 프랑스대혁명에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는 오늘날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표방하는 나라가 됐다. 2%의 위그노가 나라를 뒤집은 것이다. 한국교회도 3·1운동에 앞장서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민족 종교로 탈바꿈했다. 소수였던 교회가 사회를 살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개신교회와 한국교회는 역사적 동질성을 갖는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장로교 총회는 장로교 신사참배 결의 80년이라는 어두운 역사와 마주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총회에서 세습금지법을 두고 격론을 펼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후손들은 오늘 우리의 결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앙뒤즈(프랑스)=신상목 종교부 차장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