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의 주장에 관하여/ 공헌배

by dschoiword posted Dec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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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익환 목사의 주장에 관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문씨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도 문씨다. 두 분 다 문씨다. 두 사람의 본(本)은 같을까? 그리고 영화배우 문성근씨도 문씨다. 그래서 문성근씨가 문재인 후보의 선거운동을 해 준 것일까?

문익환은 1976년부터 시작하여, 1994년 별세하기까지 총 6번(?)의 감옥생활을 경험한 시인(詩人)이요, 저항가이며, 목사요, 구약성서학자이며, 히브리어 선생이고, 그 이른 시기에 미국 유학까지 한 일리트요, 시인(詩人) 윤동주의 친구인 늦봄 선생이시다.

그는 1989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고, 그 후 또 감옥으로 갔다. 해도 해도 감옥 갈 일밖에 없었던 이 투철한 저항가(?) 아니, 몽상가는 누구일까? 통일운동가였다.

사람들은 이 사람에 대해 시인이거나 저항가이거나 신학자이거나 운동권의 대부이거나 공동번역 성경의 번역자이거나 등등의 수식어들을 붙이겠지만 사실 그는 역사철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쓴 책 중에는 <히브리민중사>라는 것이 있다. 즉 구약성경을 민중이라는 시각에서 조명한 책인데, 나는 그 분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채로운 것은 문익환 목사가 한국사에 대해 한 말이 있다. 그것을 들어보자:

또, 통일에는 조국통일이라는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조국 통일은 역사를 통일하는 것인데,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북쪽에서는 정부의 정통성을 항일 무장투쟁에 두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그 얘기를 못해요. 친일파들(중략) 어떻게 남과 북을 한 역사로 하느냐. 그리고 문화와 전통을 통일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죠. 이것을 저는 조국통일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국토통일보다 훨씬 중요한 대목이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정말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문익환 전집> - 통일1,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9, 490).

이륙시간은 오후 3시 였습니다. 가던 길을 되짚어 압록강이 국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국경을 압록강으로 끌어내린 김부식이야 말로 역적중의 역적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만주 광할한 땅을 날고 있었습니다(<문익환 전집> - 통일 3,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9, 186).

이를 따르면,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김부식은 우리국경을 압록강으로 끌어내린 사람이 아니다. 대동강이라면 모를까? 압록강은 조선시대 때의 국경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었다. 이를 볼 때, 문익환 목사는 한국사 공부를 많이 한 분 같지는 않다. 문익환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다만 그 하나님 경험을 2천년 간의 기간을 뛰어넘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경험으로 현재화하느냐는 점 만을 논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겠다. 그 하나는 구약 성서를 예수,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 불트만, 김재준(중략)을 통해서 만나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을 거쳐 2천년 교리사의 끝에서 만난다는 일이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강렬한 하나님 경험은 2천년 기독교의 전통 속에 면면히 살아 있다.(중략) 구약의 하느님은 의와 진노의 하느님이요, 신약의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상당히 보수적인 한국 강단에서 흔히 듣는다. 그것은 말시온과 종이 한 장 차이다. 슐라이에르마허-하르낙-불트만을 잇는 루터교 신학의 흐름이 말시온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나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2천년 기독교역사를 뛰어넘어 구약의 세계와 직접 같이 호흡해 보는 길이다.(중략)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sitz-im-Leben)어디서고 구약의 하느님을 경험해 볼 수 있다(<문익환 전집> - 신학2,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9, 288).

따라서 문익환은 서양신학을 거치지 말고,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직접 유통시켜보자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유통시키려면 한국사 공부를 해야 한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서 학위를 취득해서는 반드시 한계가 생겨버린다. 차라리 도유호처럼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가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윤보선 대통령 역시 전공이 혹시 고고학이었던가? 이거 잘 모르겠네! 에든버러대학교 출신이던데!

즉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매개하거나 역사연구가 중요하다면 한국사 공부를 했어야 할 텐데, 문익환의 전공은 너무 히브리어 일변도였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문익환은 역사연구를 중요시하자고 했다. 어떻게?

북한에서는 이걸 잘 모르나? 이미 수 십 년 전에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 한 말들이 있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 역사이야기는 하지 않았나?

문익환은 김부식이 싫다고 했는데, 그러면 묘청이나 신채호는 좋아했는가? 뭘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문재인 정부가 답 좀 해주면 안 되겠나?

김상태의 주장에 의하면, 신채호는 한국 역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다. 오늘날의 제대로 된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사실 상 신채호의 후예들이다. 그래서 신채호야 말로 고대사와 고조선(古朝鮮)을 아주 인상적으로 발굴해 낸 학자(學者)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신채호는 유학자(儒學者)다. 그리고 그는 강력한 항일(抗日)운동가였다. 그런데 유가철학(儒家哲學)은 조선시대의 이념으로서, 조선을 ‘소중화적(小中華的) 모화사대관(母華事大觀)’으로 인도했던 교사(敎師)였다. 그토록 깊게 고대사를 발굴해 냈던 신채호조차도 유가철학자(儒家哲學者)였다. 반면 일본은 굳이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조선인들에게 가르치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정책만큼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좋아할 일이었다. 이를테면 일본의 중국침공은 고조선의 후예들에게서 나타났던 특성이며, 일본이 했던 ‘대동아 공영권’은 백제의 집단무의식이 발현 된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채호는 일본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의 집단적 자아(集團的 自我)’가 고조선이나 백제에게 맞추어 져 있을 나라가 일본일지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신채호는 일본에 대해 반대(反對)했다. 그는 강력한 항일(抗日)운동가였다.

쉽게 설명하면 단재 신채호의 소원을 가장 실정적으로 실현해 줄 나라는 일본이었다. 역사연구에 있어서 본다면 일본은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소위 ‘왜곡’해 대던 나라였지만 고대사의 고토들을 실질적으로 되찾아 줄 나라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사실 상 신채호의 소원을 실천해 준 나라는 일본이었다. 즉 신채호는 ‘왜(倭)’에 대해서는 깊게 연구하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발로 뛰어다니며 고구려의 유적지들을 적지 않게 가 보았을 테지만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적힌 ‘왜(倭)’라는 단어가 어디를 가리킬 만 했는지까지는 연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신채호는 그 시대로서는 매우 놀라운 역할을 했음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때의 지식인들에 비교한다면 분명 신채호는 개벽(開闢)적 인물이었다.

신채호나 묘청의 소원들을 실천해 줄 또 다른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내한 개신교 미국 선교사들인 언더우드 부부였다:

우리 모두는 이 다음의 선교지부는 북쪽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이미 평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중략) 단지 이제 선교 지부를 한 군데에서만 시작할 수 있다면 그곳은 평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1890년 8월 4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H. G. Underwood,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 편지(1885-1916)>, 김인수 옮김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2), 226-227).

그래서 평양이야 말로,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고려 때의 묘청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려 하다가 개경파에게 져 피살되었다. 그래서 서경천도는 실패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을 반만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고까지 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평양은 웬지 인상적인 곳인데, 하필 언더우드 선교사가 지목한 곳이 그곳이었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노회와 총회는 모두 그곳에서 창립됐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는 간도동노회, 남만노회, 산서동노회와 같은 노회들이 있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회의록에는 몽골지방에 연관된 기록도 있다. 즉 그 당시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가 내몽골지방으로도 신경을 써야 할 접경지역이었을 수도 있다.

언더우드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그러던 얼마 후 빛이 다가와, 그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일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를 탐구하는 동안에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the Kingdom of Kokurei)에서는 하나님으로 불리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말은 설명적 용어로써,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이란 말의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가 발견하였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그 의미가 원래의 의미이고 지금의 의미는 거기 파생된 것임에 틀림없음으로 언더우드는 이 본래의 의미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이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사용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쉽게 살아날 것이었다(L. H. Underwood/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136).

이 주장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무엇으로 해석할 것인가? 즉 영어의 ‘God’이라는 개념을 어디로부터 빌려 올 것인가가 주제였다. 그것을 언더우드는 고구려로부터 찾았다.

유명한 과학철학자 와잇헤드는 인류 문명의 3대요소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상업의 확대, 둘째, 기술의 발전, 셋째, 비어있는 대륙의 발견이다(A. N. Whitehead,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파주: 한길사, 1996), 151). 조선 말 한반도는 바로 이 세 가지를 갖추어 가던 단계였다. 특히 만주라는 비어있는 대지를 알았다.

그렇다면 내한개신교 미국 선교사들의 정책과 신채호의 소원과는 연관을 맺을 수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맺어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거의 이와 같은 좋은 인연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없을까? 트럼프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하신 연설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거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해주었던 좋은 인연들을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이북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반도의 서북지역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들을 가졌기 때문이다.

혼인도 하지 않았던 처녀 총각이 19세기에 조선으로 왔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언더우드와 릴리어스 호튼이었다. 이들은 조선에서 혼인했고, 신혼여행조차도 평안도로 갈 만큼 서북지역에 관심이 컸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께서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펴보자:

여기에 수록된 여러 장(章)들은 모든 동방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흥미로운 나라에서 유난히 매력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몇 년 동안 살아온 나의 생활을 단순히 회고(回顧)한 것이다( L. H. Underwood,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서울: 집문당, 1999), 17).

이곳(熙州)에는 인디언이나 야만족은 없다. 그곳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Underwood, <상투의 나라>, 83).

그들의 복장을 제외하고는 청국인이나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대개는 그들(일본인?)보다 키가 크고 모든 특성으로 볼 때 몽고인종이었다(Underwood, <상투의 나라, 25).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놀랐다. 즉 조선인들의 의복은 어떠하며, 인상은 어떻고, 특별히 인종적으로 어디에 속하는지조차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발달 된 체질인류학으로 하면, 호튼 여사의 주장이 옳지는 않지만 그녀가 조선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감리교의 선교사였던 호머 B. 헐버트의 저술이었다. 그가 쓴 책 가운데에는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연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책을 쓰려면 탁월한 학문성이 있어야 가능하다. 쉽게 말하면 한국인들도 몰랐을 자기 나라말(自國語)의 뿌리를 서양 선교사가 찾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즉 묘청이나 신채호의 소원들을 이루어주기 위해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매우 좋은 아이디어들을 가졌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묘청의 소원들을 재해석해주기에는 더 없이 좋을만한 정책들이었다. 그 시대로서는 그랬다.

그러나 문익환으로서는 이정도의 아이디어를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문익환은 민중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일성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익환과 김일성의 말을 들어보자:

문익환: 주체사상이 뭡니까?
김일성: 주체사상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겁니다. 소련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가 약소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면 주체사상은 민족주의 인가요?
김: 사회주의도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종교인들에게 말합니다. 저는 동지들에게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
김: 남한은 정말 통일을 원하는 겁니까?
문: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체제연합’은 실질적으로 북이 제안하고 있는 연방제 통일 방안에 매우 가까이 접근되어 있습니다.
김: (비서를 부르며) 오늘 밤 당장 방송하라. 그렇다면 노태우 대통령도 만나지. 김대중 총재,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고 집단적으로도 만나지(<문익환 전집> - 통일3 (서울: 사계절출판사, 1999), 167-171).

따라서 김일성은 그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시인한 셈이 된다. 그러나 김일성은 미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였다. 즉 김일성은 반미(反美)정책이 곧 민족주의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다시 말해 문익환이나 김일성은 모두 반미(反美)정책에 동의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게 착각이다. 이는 그 두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한반도 사람들이 갖고 있던 오해들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도 시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의 사람들은 이씨 조선시대가 갖는 그 심각한 문제점들을 간과 한 채 막연하게 일본을 싫어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의 사람들은 심각할 정도로 고대사를 망각해버렸다.

문익환의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역사를 통일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그는 고대사를 모르지 않은가? 또한 김일성은 그 스스로 민족주의자라고 해놓고서는 반미(反美)정책에다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고대사를 공부한다면 문익환과 김일성의 정책에는 아주 큰 문제들이 있다. 왜냐하면 고대사에서는 미국이 적이 아니라 중국이 적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수나라는 113만 수천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를 침공했고, 당나라 역시 고구려로 쳐들어 왔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읍으로 그 피 끓는 애국심들과 평양성의 문이 열리기까지 싸웠던 그 고구려의 군인들이 생각나지 않는단 말인가! 고대의 당나라가 고구려에게 무슨 짓들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김일성이 만약 그 스스로 민족주의자가 되고 싶으면 반미(反美)정책이 아니라 반중(反中)정책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민족주의는 반(反)지나(支那)정책에 있어야 한다(We need to the Perspective of anti Chinese policies).

과거사(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행태들)를 볼 때 기독교는 북한에 매우 많은 공을 들였고, 많은 혜택들을 주었다.

조선시대의 평안도는 소외지역이었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그 서북지역에 가장 큰 공을 들인 사람들이 내한 개신교 미국선교사들이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북한의 적이 아니다. 묘청의 억울함들이나 신채호의 소망들이나 고구려의 소망들은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있다.

문익환은 역사의 중요성들은 알았지 싶은 데, 실질적으로 역사를 공부해 본 사람 같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그 민중신학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100 여 년 전 민중과 함께 한 사람들은 내한 개신교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내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의 민중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옮기며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은 마치 양치기 없이 황야에서 길을 잃어 ‘기운이 없고 배고프며 죽을 지경이 된’양과 같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이르렀을 때는 예수의 존재를 받아들여 안식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는 많은 지친 영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감리교 신자를 포함하여 여나믄 명도 안 되는 우리 일행 앞에 산적해 있던 과제가 아무리 막막하게 보였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그때까지도 조선어 단어 몇 마디를 더듬거릴 수 있을 뿐인 상태에서 이 나라의 오래 정착된 종교 대신에 1,400만 명 이상의 국민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하고자 했다. 우리는 가난한 농부들과 나이 든 여자들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공의 요소인 승리의 확실성은 신앙의 신성함에 있었으며, 우리를 보낸 전능한 하느님에게 있었다. 이러한 생각만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L. H. Underwood,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신복룡, 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서울: 집문당, 1999), 33-34).

 

공헌배 박사 페이스북 글 2018.5.28.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