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정재현

by dschoiword posted Jun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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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정재현 교수(연세대)의 신앙성찰

 

<베리타스>에서  옮김

 

과학의 출현이 새로이 열었다는 근세를 탈종교화 또는 세속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세 종교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하여 인간을 더욱 확실히 잘 살게 해 줄 것이고 결국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과학주의까지 치달아갔지만 그것은 곧 근세 붕괴의 서주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우리 시대인 현대는 아직도 엮어져가는 중이라 잠정적으로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앞선 근대와 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후기근대이기도 하고 불연속적이라는 뜻에서는 탈근대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소 혼란스러워 보이는 우리의 시대에 종교의 퇴조를 여러 모로 예견한 이들이 꽤 있었지만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종교의 운명을 그렇게 점쳤던 말들이 딱히 맞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굳이 즐거워할 일만도 아닌 것은 종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무종교인들이 그 어떤 종교인보다도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엄연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종잡을 수 없어 보이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인류가 씨름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 분쟁과 전쟁 등이 실제로 종교적인 이유에 의한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거나 포장하면서 충돌을 향한 폭발력이 증폭되는 현실은 굳이 논의나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지닌 집단이 권력을 차지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종교적 포장을 동원하면 순교를 불사하는 종교적 극단주의가 극악무도한 폭력의 주범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명한 일입니다. 나만이 옳다는 진리에 대한 신념과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 사이에서 고민할 여지없이 진리의 깃발이 치켜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비단 국제뉴스를 타는 범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사실 이런 문제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갈등과 충돌은 이름이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의 종교, 같은 이름의 신을 믿는다는 종단이나 교단들, 교파들 사이에서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교 현실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당파성과 사랑의 비당파성 때문에 신앙과 사랑이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다고 예리하게 지적해주기도 했지만 종교인들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간단하게 교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삶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문제를 여기서 조금은 차분히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여러 종교들이 한데 얽혀 있고 심지어 같은 이름의 종교 안에서도 결코 이에 못지않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으니 도대체 근본적으로 어떻게 문제를 진단하고 또한 처방을 모색해야 할지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른 바 다종교상황에 대한 정직한 분석을 먼저 해야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런 토대에서 우리가 함께 관심하는 그리스도교의 마땅한 모습을 그러한 다종교상황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다종교상황과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을 살피고 들어가겠습니다.  

 

1. 서설

 

종교다종교상황이라는 것

 

종교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고 바로 단도직입적인 대답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관심하려는 기독교 입장에서 종교란 말이 어떤 뜻을 지녀왔는가를 묻고자 할 따름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라는 말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기독교가 태동할 때에는 이미 주변에 많은 종교들이 있었으니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꾸리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저항하면서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태동과 핍박, 순교의 역사는 이를 웅변해줍니다. 또한 기독교 신학이 호교론 또는 변증론으로 시작했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주후 1세기에서 시작하는 태동기에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항하여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핍박받던 순교자의 종교에서 군림하는 황제의 종교로 급격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변화는 땅 끝까지 이르러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계화의 발판이 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너무도 빨리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힘 숭배사상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할 정도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은 종교에 대한 과학의 도전으로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시작하게 된 근세의 여명이 돋아나기까지 계속되었으니 15세기까지 상당히 긴 세월동안 기독교는 지배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지배종교가 된 기독교는 스스로를 지칭하기 위해 굳이 종교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라는 말로 충분했기 때문에 그것이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보통명사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이 때 종교란 말은 올바른 가르침또는 경건한 믿음의 태도를 일컬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과학에 의해 새롭게 열린 근대는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계산과 측량을 거쳐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다 끝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목숨을 내건 도전이었지만 이게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땅, 다른 사람, 다른 문화, 다른 종교들을 만났습니다. 지배종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도 이런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그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와 같으면 옳은 것이지만 나와 다르면 그냥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종교의 위상이 흔들리겠기 때문입니다. 이걸 나중에 배타주의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틀린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었습니다. 적어도 근세전기라 할 16-17세기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점점 더 발달하고 다름과의 만남이 더욱 빈번해지면서 마구 틀렸다고만 간주했던 다름이 꼭 틀리지만은 않다는 것을 점차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의미, 도덕과 윤리에 대한 전통과 문화를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하게 엮어가면서 살아가는 모습들과 만나면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다고 하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마구 틀렸다고 배제해 버릴 수만은 없음을 깨닫고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기독교가 최고로 우월한 종교이고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에 비하면 수준이나 등급이 낮은 단계에 속한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기독교를 기준으로 정도의 차이를 평가하면서 서열을 매기는 식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들이 통째로 틀렸다기보다는 세계관과 도덕, 초월체계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한 수 가르쳐 기독교와 같이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을 내치기보다는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여 가르치겠다고 하니 이를 일컬어 포괄주의라 하는데 가르침이 바로 선교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18-19세기에 걸친 근세후기의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시대인 현대로 넘어오면서 상황은 또 급변합니다. 과학이 열어준 근대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과 함께 시작했다고 평가됩니다. 중세의 암흑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근대는 그런 여명과 함께 시작한 역사낙관주의가 인간중심주의와 함께 찬란하게 전개되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거품 물던 과학주의는 과학 스스로에 의해 붕괴되었고 인간은 이제 소외와 허무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근세가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걸 물려받은 현대인들은 불안과 절망을 거치면서 그동안 억눌려졌던 물질과 육체의 해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인 현대는 그 시작이 근대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중세의 종교도 아니고 근세의 과학도 아니라면 이제 인간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게 현대인들이 묻고 씨름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전제군주체제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노예의 편안함이 대중의 기본정서였습니다. 근대에는 시민사회로 전환되었다고 하지만 이 때 시민이라는 것은 똑똑한 과학적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근대를 이끌었고 이때에도 그저 이들이 제공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가 가리키는 것과 같이 물려받은 땅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고전시대의 1차 산업 위주에서 과학이 만들어준 기계화에 의한 2차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부의 재분배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16세기 과학혁명의 효과가 점차로 대중에게 퍼져나갔으니 18세기의 계몽주의는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우리 시대인 현대라면 과연 현대인은 삶의 매뉴얼을 더 이상 다른 곳으로부터 받을 수 없게 되고 각자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안과 절망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켰으니 여기서 실존이라는 이름의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이제 인간은 알알이 개체화되었습니다. 개인주의적 민주주의가 점차로 사회의 정치체제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런 맥락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중이 곧바로 개체적 결단에 익숙할 수는 없었으니 많은 처방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여러 종교들 사이의 관계도 요동을 치게 되었고 기독교의 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여러 다른 종교들 사이에 함께 있는 하나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종교라는 말도 필요 없던 중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많이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일 뿐 아니라 그것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소위 다원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습니다. 여러 종교들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상세히 논하겠지만 다원주의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그 안에서도 서로 충돌하는 입장들이 꽤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아직도 다원주의에 대한 폭력적 매도가 지배적인데 이는 거의 대부분 이제는 부적절한 것으로 폐기처분된 고전적 유형의 다원주의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필자는 다원주의에 대한 단순한 지지를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데에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위에서 논한 일련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의 관계

 

서로 다른 여러 종교들이 함께 있는 오늘날의 모습을 다종교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뼈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핵심들을 추려본다면 교회, 그리스도교, 성서, 하나님, 이렇게 열거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더 많은 핵심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뼈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동의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넷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넷이 모두 같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차원이 다르니 액면 그대로 무조건 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소유 또는 귀속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고 보는 가장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서 그 수용과 해석의 권한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에 속하며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현실에서 교회로 결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넷은 등호(=)를 써서 교회=그리스도교=성경=하나님이라고 정리됩니다. 순서를 정반대로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요체로서 전부이며 그리스도교는 성경을 경전으로 채택하고 전수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독자적 종교이고 성경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유일한 계시 또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돈독한 신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선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부터 살펴봅시다. 과연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같은 것인가요? 교회는 종교공동체이지만 종교가 공동체에만 귀속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신앙을 따르는 소위 가나안신자들이 점차로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종교는 공동체보다는 훨씬 더 큰 범위로 신념체계를 포함하여 사고방식에서 생활양식에 이르는 문화적 차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종교의 본질에 대한 변질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구현체로서의 종교가 인간의 일상적 차원에 이르지 못하고 고유성을 빌미로 무슨 특수한 집단이념이나 밀의적인 결집체로 머무른다면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본뜻은 아닐 것입니다. 본질도 아닌 것에 대한 본질주의적 고수가 오히려 종교의 쇠퇴를 더욱 부추겨왔다면 이제는 스스로의 자폐적 본질주의라는 자가당착의 엄청난 착각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자기만의 신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것처럼, 오늘날 근대적인 의미와 형태의 종교는 쇠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개인 단위에서 종교성 고취에 대한 수요가 점증한다는 진단은 교회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개인주의가 부각됨으로써 공동체성이 도전받고 있는 상황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할 일이지 그리스도교를 교회와 그저 동일시하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교와 성경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물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전수와 해석, 적용의 권한과 의무를 내세워 성경을 그리스도교의 전유물로 주장한다면 이는 오히려 성경을 그리스도교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오류일까요? 바로 대답하기보다도 거꾸로 묻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향한 것이라면 어떻게 성경이 온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그리스도교만의 것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온 세상, 아니 백번 양보해서 적어도 이 지구를 위한, 그리고 지구를 향한 것으로 새겨야 합니다. 그 범위를 지구로 한정하는 것은 다소 조심스럽지만 지구 바깥 세계에 혹 있을 수도 있는 생명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성서에 근거해서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지구버전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셨지만 물론 전부를 알려주신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부로 우주로 나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이 지구 위에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부분이 엄청 큰 상황에서 성서를 그리스도교권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적어도 지구를 향해 계시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가 지구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일부일 따름이니 따라서 성서는 그리스도교보다는 훨씬 큰 것으로 새겨야 합니다. 성서를 그리스도교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선물로서의 마땅한 위상을 정립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선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간주하는 근본주의적 문자주의가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성경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 입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자기가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을 기준으로 재단하게 될 소지가 너무도 큽니다.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축자영감설은 에누리 없이 신성모독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조금은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 말조차도 문자 그대로 새겨서는 오히려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그런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말씀 또는 계시라고 할 때 그 뜻은 무엇인가요? 성서가 스스로 우리에게 그 뜻을 드러내줍니다.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성서가 직접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말입니다. 예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성서를 펴면 제일 처음 나오는 창세기를 봅시다. 1장과 2장에 서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창조기사가 나옵니다. 굳이 문서설을 들먹이지 않고 그냥 한글성서를 읽어도 충분합니다. 앞장에서는 하늘과 땅, , 물과 뭍 등의 순서로 창조가 시작되어 인간창조에 이릅니다. 물도 넘치도록 풍성한 옥토가 배경입니다. 뒷장은 정반대로 사람이 제일 먼저 창조되고 그 배경도 건조한 사막으로 추정됩니다.


만일 성서의 전승자료들을 전문가들이 모여 깔끔하게 체계적으로 편집했다면 둘 중 하나만 수록했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돌하는 두 개의 창조기사가 제일 앞에 한 데 묶여 경전으로 수록되었습니다. 편집기술로 보면 어설퍼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의 입장에서 보면 아예 시작부터 읽을 수도 없으니 더욱 난감합니다. 한 장은 찢어버려야 합니다. 결국 어떤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신화이니 따질 일이 아니라고 하는 또 다른 입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왜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는가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엄청난 길잡이라고 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 또는 계시라는 것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리쏟아붇고 받는 쪽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상호관계 안에서의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 충돌하는 기사들의 동시수록이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이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서로 만나 주고받는 상호적 대화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서는 그러한 사건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과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고백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직접적 보도라기보다는 인간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고백록이며 이를 뼈대로 체험한 사건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러니 창조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처한 배경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고 고백되며 성찰될 수밖에 없으니 여러 자료들이 나오게 됩니다. 서로 충돌하는 내용을 담은 창조기사들이 창세기의 제일 앞부분을 구성하고 있으니 성서는 시작부터 어떻게 엮여졌는가에 대해 성서가 스스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게 오히려 성서의 위대함입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과 교통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다만 성서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사건에서 듣고 고백하며 체험한 것들에 대한 인간적 진술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서의 원천이시지만 성서에 모두 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서에 갇힐 수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성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신 분입니다. 이 말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크신 분이라고 했지만 크기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우주의 크기를 감 잡고 있는가요? 우주는 고사하고 지구의 크기에 대해 어떤 느낌이라도 가질 수 있는가요? 물론 물리적 차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지구를 향해 보여주신 모습이요 지구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만나는 사건에 대한 기록이니 지구버전일 뿐인 성서에 지금도 우주를 창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제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성경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하나님을 성경 안에 가두는 신성모독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인정하기 어렵다면 한 말씀 더 드립니다. 바로 앞서도 말했지만 이 대목에서 반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주셨지만 물론 전부를 알려주신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남아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단계적으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아주 작은 앎일 뿐입니다. 모름이 더욱 크고 많지만 그래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른 바 무지(無知)의 지()’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우리는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릅니다. ‘무지(無知)의 무지(無智)’입니다. 결국 우리의 앎은 이런 차원 안에서의 아주 조그마한 앎입니다. 성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앎은 이런 무지의 무지 안에서, 무지의 지 위에 얹혀 있는, 아주 조그마한 앎과 믿음일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산을 옮긴다고 하셨는데 산이 이리저리 옮겨지는 일이 흔치 않은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하물며 그 믿음보다 작을 앎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앎으로 하나님을 마구 가늠합니다. 이런 가늠이 어디까지 가는지 살피려고 멀리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가관입니다.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사례를 살피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결국 관계는 교회<기독교<성경<--하나님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면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또는 기독교, 또는 성경을 붙들고 늘어지는 환원주의에 사로 잡혀 있다고 스스로를 진단해야 합니다. 교회주의가 그렇고 기독교주의가 그러하며 성경주의가 그러합니다. 교회사가 증명하는 바이니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자기에게서 역사가 시작되는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뿐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교회보다 그리스도교가 더 크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성서에 갇혀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이 구호는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뭘 어떻게 생각해? 당연한 거지!”라고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착실히 하시는 분들에게 교회와 구원의 분리불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언제나 옳고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라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할 이유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도 이런 구호는 꽤 일찍이 등장했습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중세 초기인 7세기의 키프리우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구호라고 하겠습니다.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중세 절정기인 13세기 교황 보나파시오가 교회의 치리를 목적으로 이 구호를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대의 전환이 근세로, 현대로 넘어오면서 세상이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듯이 보이자 교회는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듯이 이 구호를 재천명했습니다. 현대가 시작할 무렵인 1860년대에 열렸던 가톨릭교회의 제 1차 바티칸공의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60년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이 고전적 구호를 폐지하고 현대로의 전환의 길목에서 근대적 방식으로 정책을 바꾸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호는 가톨릭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니 개신교회의 경우도 이 선언은 포기할 수 없는 기조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회가 이 구호를 오히려 더욱 목청 돋우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교회가 전권을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은 옳은가요? 교회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성경, 나아가 하나님까지 모두 같다면 이 구호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보다 그리스도교는 훨씬 크고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성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라면 구원을 교회에만 묶어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종교개혁자가 인간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셨다고까지 주장했을까요? 이에 대해 시중에 황당한 오해들이 많이 있지만 이는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과도함을 불사하고서라도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려는 갸륵한 충정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언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정설에 관해 자가당착의 오해들이 꽤 팽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선 시중에서 이 예정설을 문자 그대로 새기면서 절대적 진리인 양 읊조리시는 분들이 빠지는 자가당착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체로 자기는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듯합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 주장을 그렇게 애써 반복할 이유가 없기는 할 터이지요. 그러나 예정설은 한 마디로 구원의 여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을 것인가의 여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일 터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이걸 가리키는데 그러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태어나기 전부터 천당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풀어버리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본인 자신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니 도대체 전도하고 선교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예정설은 문자대로 풀어낼 일이 아니라 그 취지에 주목하여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과도한 수사로 새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과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에서 더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 교회의 제도적 권위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이로부터 벗어난 민중들이 문화적-종교적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기에 이에 대한 처방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실하게 새기려는 애달픈 뜻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했지만 사실 예정설에 대한 설명을 위한 표현이고요, 보다 적절하게는 은총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은총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좌우될 수 없는 무조건적인 것임을 가리키고 따라서 믿음을 포함하여 인간의 어떤 것보다 앞선다는 뜻에서 선행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무조건적이고 선행적인 은총이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만의 것도 아님은 물론 성경에만 갇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는 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고 있었고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으며 성경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교회나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믿음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며 뜻을 도모하는 자연발생적 공동체이고,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믿음을 사회와 역사 안에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계도할 필요성으로 엮어진 문화전통이며,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믿음의 지침서로서의 위치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는 믿음의 대상이나 주체가 아니라 이를 가리키는 보조적인 요소들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원초적 대상이고 궁극적인 주체이십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보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들의 본능과 욕망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과 동일시하여 성경주의로 빠지고, 그리스도교와 한데 묶어 기독교주의라는 종교주의로 빠지며, 결국 믿음의 공동체일 뿐인 교회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교회주의로 빠지고 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계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여러 형태의 주의로 빠지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이니 우상숭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성경주의도 내가 읽고 받아들이는 대로의 성경주의이고, 기독교주의도 내가 파악하는 대로의 기독교주의이며, 교회주의도 내가 속한 교회를 기준으로 하는 교회주의입니다. 결국 이러한 주의적 행태의 뿌리에는 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으면 옳음이고 나와 다르면 그냥 다름이나 아니라 그름이나 틀림입니다. 결국 성경주의나 기독교주의, 교회주의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 또는 자기절대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절대화라는 문제는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스스로 볼 수 있으면 이미 자기절대화가 아니겠지요. 해서 이 문제는 스스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도 못하는데 무슨 해결을 기대하겠습니까? 교회사는 이에 대한 무수한 증거들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자기절대화에 의한 문제는 성경이나 기독교, 또는 교회와 관련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믿음의 원초적 대상이고 궁극적 주체이시라고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자기절대화는 여지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솔직히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일 터인데 그저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만을 기준으로 내세웁니다. 허나 이야말로 하나님을 자기방식으로 그려내고 믿으니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림 속에 갇혀진 하나님, 결국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름은 하나님인데 실제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실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이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라면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이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킬 뿐이니 성경을 그 자체로 믿을 것은 아닙니다. 성경문자주의가 오히려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종교, 그것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가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마구 동일시될 수 없으니 하나님 대신 그리스도교를 믿을 일은 아닙니다. 교회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더욱이 죄인을 불러 모으셨다면 이제 교회야말로 서로 허물을 보듬고 격려하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를 꿈꾸는 전위대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점차로 벗겨가는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우상화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이제 각도를 살짝 돌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봅시다. 이 말은 마치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는 것처럼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무슨 망발이냐?’고 호통 치시려는 분들이 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론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구원이 교회 안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도 교회는 구원의 주권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구원의 주권을 가지면 면죄부 같은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꼭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교회의 역사만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회라고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고 협박하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라면 그게 면죄부 판매와 무엇이 다릅니까? 사이비종파들과 이단들이 이런 주장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은 그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소위 정통교회라고해서 이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게다가 현실모습을 보더라도 교회가 구원을 제공할 위치도 아니고 안내할 자격도 없으며 견인할 능력도 없으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구원을 교회에 귀속시킬 수 있습니까? 도무지 타당하지 않으니 이제는 구원을 교회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 되돌려드려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본디 하나님의 것인데 되돌려드려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불성설이 타당한 말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이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혼동하면 범주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넷을 잘 구별한다고 범주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깊은 문제는 아무리 이 넷을 잘 구별해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두에 철저하게도 인간 자신이 중심적으로 깔릴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성을 넘어서는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거니와 앞으로도 말씀드릴 터인바 필자는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하나님을 실체로 규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한에서만 성립합니다. 교회, 그리스도교, 성경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역사적 실체로 간주함으로써 교회주의, 기독교주의, 성경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오랜 종교적 본능과 습성이 그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로, 가장 높은 존재로 그리면서 꼭대기로 모셔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하나님을 절대자, 또는 무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리키는 상징일 수밖에 없는 이런 표현들이 잡아내는 개념으로 둔갑하면서 최고위의 고정적 실체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이 그렇게 해 왔고 이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 고전신학이 그래왔으며 우리는 그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고의 절대적 정점에서 무수하게 다양한 상대적 종교전통들과 관계하시는 고정적인 존재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유로,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행위이고 들이닥치시는 사건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움직이는 동사보다 고정적인 명사가 더 높은 품위를 지닌다는 명사주의의 관점에서는 어색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런 명사주의를 부추겨온 동일성의 이념이 인류역사에서 지대한 공헌 이상으로 억압적인 폭력을 전개해 온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놓아드려야 할 때입니다. 이 또한 본디 망발인데 이게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성서가 증언하는 사건과 행위로서의 하나님 모습에 가까운 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사람에게 신은 명사이지만 예배하는 사람에게 신은 동사이다라는 어느 종교학자의 말은 하나님을 최고로 모신다는 명분으로 고정적 정점에 가두려는 우리의 유혹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통찰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건이고 행위이시니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교회 안에 머무르시지 않고 길거리를 배회하십니다. 그리고는 신자가 아니라 이를 넘어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고 인류의 역사(歷史)입니다. 성경은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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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은?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앞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독실한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당착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교회를 앞세운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그것도 내가 속한 교회만이라 하니 자기절대화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교회나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얼마나 심각하게 자아내는지를 진솔하게 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성경도 무슨 법전인양, 휘두르는 칼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아직도 생소하거나 여전히 꺼려진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인간을 스스로 살펴봅시다. 나 자신을 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 그리스도교, 성경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우리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비/의도적으로,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렇게 깊이 깔려서 작동하고 있는 ‘자기라는 인간’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당연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길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서 나누었던 일련의 관계에서 살피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이라는 관계에서 자기라는 인간은 어디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면, 한 그리스도교인은 개인으로서 교회에 속합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교회보다 앞서 가장 작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만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교회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고 가나안 교인들도 점차로 많아지지만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교회 밖이 교회 안보다 훨씬 더 클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는 것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교회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거기에 더 크게 작동하는 가치와 목적들을 부여하며 살고 있습니다. 166:2라는 공식이 이걸 가리킵니다. 하루 24시간에 7을 곱하면 일주일 168시간인데 그 중 2시간 정도 교회 안에 머물고 나머지 166시간을 교회 밖에서 교회 밖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차가 상당하게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 쓰고 있는 말들이 교회 밖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공개된 비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의 연조가 길고 깊을수록 교회 안과 밖 사이를 넘나드는 일에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능숙해지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주의자가 됩니다. 상호소통불가의 영역을 넘나들면서도 이 사이의 거리에 대한 느낌이 점차로 희미해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교회 안에 깊숙이 속한 것처럼 느끼면서 살지만 실상은 교회 밖에 더 크게, 더 많이 지배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인간이 교회 안에만 속해 있지 않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울러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 안과 교회 밖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는 새삼스럽지만 정직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그 거리를 망각하면 교회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당연하게도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 사이의 실랑이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한 인간이 하나의 종교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무슨 망발이냐?’고 대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종교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교회에만 속해 있지 않다는 것보다 더욱 분명합니다. 겉보기에는 한 교회에 속해 있어도 한 종교에만 속해 있기는 어려우니 말입니다. 한 인간의 종교성을 분석해 보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니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 안에 여러 종교 전통들이 신념체계를 포함하여 사고방식에서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넓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종교상황이 사회적으로만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까지 이른다는 말입니다. 한 개인 안에 여러 종교들이 겹치고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의 제목을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라고 했는데 세계만이 다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간도 개인적 차원에서 이미 다종교적입니다. 물론 이는 동양종교문화권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황하문명권에서 보면 유교-불교-도교가 한 개인 안에서 얽혀 있고 인더스-갠지스문명권에서는 힌두교-불교-조로아스터교 등이 그렇게 뒤얽혀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그리스도교 배경이라는 서양에서도 근세초기까지는 이러했다고 합니다. 어느 지역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다 그러합니다. 그러던 것이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경계 짓기를 하고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면서 다른 것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 원래의 모습은 구별될 수 없는 여러 흐름들이 그렇게 얽혀 태동되고 형성되고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종교라는 것이 원래 교리-체제적 제도라기보다는 일상적 삶의 내용이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신념이나 행동양식을 어떻게 나누고 자르고 쪼갤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 우리가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종교 단위가 아니라 인간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인간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자기를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한국인의 종교적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파란만장한 20세기 역사를 겪어왔고 군사독재시절에는 정부가 체제 정당화를 위해 정신문화원과 같은 기관들의 건립을 통해 작위적으로 ‘민족 주체성’이라는 것을 부각시켰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유구한 세월을 통해 형성된 종교적 형질은 매우 중층적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바닥의 심층적인 데에는 무교적인 요소가 많고 의식적으로는 유교적인 것이 많다고 합니다. 불교가 꽤 다른 색깔을 지닌 종교이지만 심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의 종교학자들이나 사상문화연구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보입니다. 한국의 기본적인 종교적 정서는 무교와 유교라는데 이들 사이에 큰 이의가 없습니다. 이랬을 때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신의 이름이 덜컥 받아들여진 내적 동기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돌이켜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 고백의 뜻을 새기지도 않은 채 자기가 조작한 것이 아니니 자기의 믿음이 아주 순수하다고 착각합니다. 마치 아무런 배경이나 전제, 토양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앞뒤를 살피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면서 결국 자기로부터 역사가 무전제적으로 시작한 줄로 착각합니다. 이런 경향이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개신교의 엄청난 공헌에도 불구하고 호전적 전도와 반전통적 선교가 ‘생각하는 백성’의 문화적-정서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몰역사적 자만 때문입니다. 
 
그래도 감이 안 잡히십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일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해봅시다. 나 자신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교적입니까? 유감스러워할 것도 없이 아직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것보다 엄청 많습니다. 성분 분석을 해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용어를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그렇지 실상이 이럴 소지는 다분합니다. 나 자신 안에 여러 종교들이 뒤얽혀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지만 실상은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솔직히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니라고 버텨봐야 솔직하지 못한 것이니 결국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 안에 문화적이고 정서적으로 여러 종교들이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이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게 문제인 것은 솔직하게 보지 못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시작하더라도 이렇게 인간으로 파고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적으로, 한국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품성을 분석해보면 100중 50 이상은 무교적 정서가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유교적인 관념도 상당하게 끼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가 유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인들만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찰하지 않으면 몰역사적 자만이 자아도취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무교와 유교뿐이겠습니까? 그밖에 다른 종교와 문화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국 그리스도교인은 그 토양 위에 그리스도교를 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특정한 그리스도교를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그러한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교회용어와 성경구절을 쓰지만 그 탈을 벗겨내면 실상은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걸 부정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려놓고 하늘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인간의 얽혀진 얼과 생겨먹은 꼴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나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나의 대부분을 모르고 사는데, 모르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착각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누누이 반복했듯이 그 편안은 수렁입니다. 물론 그 수렁 안에는 친숙하고 우호적인 우상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의 이름은 ‘하나님’입니다. 나의 편안한 앎 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은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각도를 달리해 말해보겠습니다. 많이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여러 군데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실험을 했습니다. 두 명의 그리스도교인과 한 명의 불자를 모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 대해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절대자가 제공해주는 궁극적 경지에 대해서 읊어보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절대자는 하나님이고 궁극적 경지는 구원일 것입니다. 불교의 경우 절대는 불타이고 궁극적 경지는 해탈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전도할 목적으로 서술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각자 종교의 고유한 용어가 아니라 일상용어로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겪은 문제는 종교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막막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와 현실 사이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결국 공통개념을 중심으로 용어사전을 만들어 실험을 계속 했습니다. 그랬더니 더욱 주목할 만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절대와 궁극적 경지에 대해 두 명의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의 차이가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과 불자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아주 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을 한 데 묶어 같은 종교인으로 분류합니다. 결국 같은 것은 이름일 뿐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름만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름만 다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정도로 종교의 이름이 그 종교에 속한 개인의 종교적 정체성을 실제로 정확하게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름으로 정체성의 내용을 규정할 수 있는 듯이 경계를 짓습니다. 이쯤하면 한 인간이 한 이름의 종교에만 속한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교회보다 작기도 하지만 더 크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에만 속해 있지 않으니 이보다 더 크기도 합니다. 이래서 인간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좀 길어졌지만 이 대목에서 종교라는 단위에 대해서는 한 마디 더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여러 종교들 중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자체로 들어오면 그저 ‘하나의 종교’라고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기독교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존불가한, 아니 서로 충돌하는 그리스도교들이 하나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것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변화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20세기 초까지 신학계에서도 이런 주장을 한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역사적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의식의 결여, 즉, 주제파악의 망실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사실 몰역사적 본질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서만 떠오르는 발상입니다. 이래서 인간으로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만이 아닙니다. 공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대라고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천차만별입니다. 아니 한 지역에서도 양립불가한 그리스도교들이 같은 이름을 쓰면서 아웅다웅합니다. 이름만 같을 뿐인데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동일하고 단일하다는 의미에서의 ‘하나의 종교’는 아닙니다. 이런 것을 ‘종교적 격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달랑 한 종교에만 속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성서와 관련해서 우리를 살펴봅시다. 그런데 역시 이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무슨 불경스러운 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래도 접수가 안 된다면 앞서 성서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됩니다.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사건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앞에서 상세히 논했으니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토록 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서를 구성하는 장면의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다가오시지만 다른 편에는 무수한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간들이 성서의 주요구성 요소입니다. 신실한 인간도 있고 배은망덕한 인간도 있습니다. 위대한 고백을 했었는데 돌아서서 곧 배신하기도 하는 인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순적인 간격이 우리 같은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나게 넉넉한 공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서의 역설적인 위대함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성서를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성서와 하나님 사이에 위치하기도 합니다. 성서 안에 인간이 들어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성서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인본주의나 인간중심주의 따위를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들린다면 자신 안에서 성경주의적 우상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은지 살필 일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를 봅시다. 앞서 하나님은 성경 안에 갇힐 수도 없는 분이고 그래서도 안 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건대, 그 이유는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무한자라는, 감도 잡힐 수 없는 표현은 가장 크다는 말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크기 때문에 어딘가에 담기거나 갇힐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도 새롭게 들이닥치시는 사건이요 움직이시는 행위이기 때문에 성경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갇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도 하고 불현듯 맞닥뜨리기도 하시는 우리 인간은 또 어떤 꼴일까요? 바로 앞서 말했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인간이 돌아서서 바로 그 주님을 배신합니다. 그만 그럴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사실 우리에게 엄청 큰 위로를 줍니다. 그래도 좋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또 받아들이신다는 점에서 위로입니다. 그러나 고백하는 인간과 배신하는 인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백도 하고 배신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인간은 동일성(identity)에서 정체성(identity)을 구해왔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언제나 같은 항시-불변적 동일성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가 넉넉히 품어주는 것처럼 인간은 비동일성이 잔뜩 들어있는 정체성(non-identical identity)입니다. 자기동일성이라는 이념에 오랫동안 기만당해왔지만, 이제 나 자신이 같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할 수도 있는 여러 다름들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대 사상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혼종성’ 또는 ‘구성적 상대성’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상대성과 상대주의는 전혀 다릅니다. 아니, 심지어 반대말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필요한 대목에서 이를 다시 다루겠지만, 하여튼 ‘자기라는 인간’을 진솔하게 보는 일은 이토록 소중합니다. 되돌아보지 않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버리면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의 관계가 그저 같아 보이지만, ‘자기라는 인간’에 진솔하게 눈을 돌리면 이들 사이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종교세계의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더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⑤

앞서 살펴본 대로, ‘인간’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종교의 문제들을 아무리 심도 있게 논해도 그 뿌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종교의 문제를 인간과 떼어 놓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가 표방하는 절대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경향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대체로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우리는 종교의 원론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이상적이고 원리적인 이야기만 하니 그럴 듯 해보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위나 정오를 판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종교에 대한 많은 논의가 공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을 덮어놓고 종교만 살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종교와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라는 통찰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이 종교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해 되씹고 넘어서려는 성정이 초월을 지향하게 되니 이를 일컬어 종교성이라 하고 그래서 인간은 일찍이 ‘종교적 인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물론 여기서 핵심은 초월 또는 무한으로 그려지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을 추구하다가 급기야 숭배하게 되면서 종교성이 엮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하여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앞서 살핀 대로,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나님이라는 일련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교회보다도 작지만 교회 밖에서 더 많이 살고 있고, 그리스도교에서 자기정체성을 꾸리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성서 안에 등장하지만 성서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할 만큼 엎치락뒤치락하고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이런 실상을 외면하면 마치 인간은 전혀 없는 듯이 이 일련의 관계가 거기에 그렇게 하나로 뭉쳐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힘을 추구하고 숭배하는 인간이 엄연히 중심적인 기준으로 버티고 있는데도 그런 줄 모르면서 교회와 그리스도교와 성서와 하나님이 모두 같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같은 것은 이를 관통하는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집요하게 종교와 구조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힘을 추구하다가 숭배하면서 ‘종교적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인간’이라고 해도 추상적인 개념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개념으로서의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 타자와도 그렇게 다르다고 주장하는 자기가 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가 소속된 교회이고, 그런 자기정체성을 꾸리는 그리스도교이며 그런 자기가 읽는 대로의 성경이고 그런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이니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하건대, 같은 이유는 이 모두에 철저하게 그런 자기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그렇게 같고 나아가 하나인 줄로 알게 됩니다. 자기 앎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서는 열심히 붙들고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되어버렸는데도 독실한 신앙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치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인간 개념이 아니라 타자와 그렇게도 구별되게 다른 줄로 착각하면서 거리를 두는 구체적인 자기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자기라는 인간’이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것은 종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일상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종교 안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리의 이름으로 순교도 불사하는 신념의 숭고함을 마구 부정할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서는 그러한 신념 안에 깔려 있을 수도 있는 ‘자기’를 살피지 않으면 여지없이 자기강박이 되고 타자를 향한 독단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강박과 독단이 얽혀 엄청난 폭력과 비극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게 자기도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돌아볼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자기도취가 가져다주는 희열과 충만을 종교의 궁극적 경지로 새기면서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찬양하는 것도 자기이지만 찬양을 받는 것도 자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심층을 꿰뚫은 몇몇 종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기라는 인간’을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왔습니다. 소승불교의 ‘무아(無我)’가 그러하고 대승불교의 ‘공(空)’이 그러합니다. 유교의 ‘수신’(修身)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도 그 핵심적 가르침이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이런 가르침이 대속사상에 휩쓸린 나머지 달갑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자기에 대하여 좀 더 머물러 살펴봐야 합니다. 다종교상황을 논한다면서 서론이 왜 이리 장황한가 하고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소상히 말씀드리겠지만 사실 종교간 관계방식인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경우 결국 ‘자기라는 인간’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의식하는가에 따라, 혹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생리적인 자기라는 것이 이미 거기에 그렇게 깔려 있어 그러한 입장들 중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간단하게나마 살펴봅시다. 

우선 ‘배타주의’부터 봅시다. 사실 이 표현은 자기에게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타자를 배제한다는 것인데, 다름을 밀어낸다는 것인데, 뜻을 이렇게 풀게 되니 부정적 분위기 때문에라도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 표현은 언제나 타자를 향해 쓰는 표현입니다. 배타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용적 자가당착입니다. 배타주의란 타자를 배제한다는 것인데 도대체 배제되어야 하는 타자는 누구인가요? 앞서 말한 대로 혼종성이나 구성적 상대성은 자기 안에 타자가 들어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배타주의가 말하는 배제하려는 타자가 자기를 구성하고 있으니 배타주의야말로 오히려 자기모순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를 대체하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시중에서 많이 회자되는 ‘복음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 표현의 취지에 동의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첫째로, 종교간 관계방식에서 특정한 입장을 ‘복음주의’라고 표현하면서 ‘복음’이라는 말을 독점한다면 다른 입장들은 복음과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자칫 다른 입장들에는 복음이 들어있지 않다고 마구 판단하는 또 다른 배타적 횡포가 됩니다. ‘복음주의’만이 ‘복음’을 전유한다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복음에 도대체 ‘주의’라는 것이 붙을 수 있는가요? 모든 형태의 ‘주의’는 전체를 부분으로 축소하는 환원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을진대, 온 세상을 향해 펼쳐져야 할 복음이 그 전체를 덮어버리는 지배의 힘으로 둔갑하는 듯이 비쳐지는 ‘복음주의’가 되어서야 될 말입니까? 세상에 누룩처럼 스며들어 그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복음이 색깔 칠하고 이름 붙이는 모양새로 나가서는 안 되겠지요. 셋째로, 게다가 ‘포괄주의’나 ‘다원주의’라는 표현에서 ‘포괄’이나 ‘다원’은 형식적 용어인데 비해 ‘복음주의’에서 ‘복음’은 내용적 용어이니 이 또한 등위적인 범주를 기준으로 한 열거원칙에 비추어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포괄주의나 다원주의도 복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가 소위 복음주의와 다를 뿐이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면 이는 단순히 용어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논리적으로는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대조적이겠고 현실적으로는 배타주의와 다원주의가 대조적일 터이니 아무리 그 뉘앙스가 부정적이라고 하더라도 배타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할 정도로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양상만 다를 뿐 다른 입장들에도 논의해야 할 꺼리들은 많이 있습니다. 포괄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자기는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배타주의의 자기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를 지닐 수 있습니다. 배타주의에서 자기는 타자를 배제하겠다는 것이지만 포괄주의에서는 타자를 자기 안에 포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서로 논리적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도대체 무엇인데 타자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고 나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자기가 이미 타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혼종성과도 달리 이질적 타자를 지배하는 논리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차라리 타자를 배제한다는 배타주의에서는 자기와 타자가 서로 무관하게 공존이라도 할 수 있는데 비해, 타자를 포괄한다는 이 태도는 만일 이를 서로 대상에게 시행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주도권 문제로 더욱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포괄주의야말로 포장만 바꾼 배타주의일 뿐 아니라 더욱 음습하고 교묘하다는 비판을 받기까지 합니다. 

다원주의에서의 자기에 대해서도 역시 검토해야 할 꺼리들은 많습니다. 아니 다원주의는 말 그대로 다원적이어서 더욱 복잡한 갈래를 펼치니 문제가 더욱 복합적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유형만 살피더라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목표는 같은데 가는 길이 서로 다른 여럿이라는 초보적이고 원색적인 다원주의 말입니다. 이런 초기 유형의 다원주의는 다름들의 단순한 공존을 말하는데 공존하는 다름들 각각은 서로 경계가 확실하여 구별될 수 있는 같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원주의도 비록 서로 다른 자기들 사이에서 다름을 밀어내거나 다름 위에 올라서지는 않더라도 서로 다른 자기들의 개별적 단위가 구별 가능한 실체라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다원주의도 그 초보적 형태에서는 자기동일성 신화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구성적 상대성 또는 혼종성으로 인식을 전환하게 되면서 다원주의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배타주의-포괄주의-다원주의라는 관계방식들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적절한가를 논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의 뿌리는 결국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 타당성은 여전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부분적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분인데 부분인 줄 알지 못하니 그냥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체라고 생각해야 적어도 자기동일성을 전제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같음이고 부분이 다름이니 전체는 좋아하지만 부분이라고 하면 싫어하고 저항합니다. 물론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모든 입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물론이고 다원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이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그래서 그런 착각이 일어나고 그런 착각을 계속 유지하게 됩니다. 아니 사실상 그런 착각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우리에게는 그런 착각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다만 착각 안에 담겨 있는 타당성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직시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저 한 부분이라고 하면 다른 부분들과 다르니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밀려들기는 하지만,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가 부분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지만, ‘자기라는 인간’이 모두 이미 이런 꼴이고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는 고정되었기보다는 움직이고 변화하는 부분입니다. 하여 내가 그런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걸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삶에서 부질없는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고 따라서 믿음을 시작하는 길일 것입니다.    

물론 내가 부분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다고 해서 또 다시 전체를 싸안을 수 있는 입장을 도모할 수도 없습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다원주의, 특히 초기 유형의 다원주의도 이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들 모두 여전히 전체를 싸잡는다는 이론을 꿈꿉니다. 물론 허상입니다. 그러나 실마리가 있습니다. 자기라는 인간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 다른 부분들로부터 떨어져 칼같이 잘라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혼종성 또는 구성적 상대성이라는 것이 이를 가리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표현한다면, 나를 이루는 한 부분은 세포가 분열하고 결합하듯이 다른 부분들과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계속하여 흐믈거리고 있습니다. 사실상 자기란 사실 무수한 타자들이 들락거리는 곳입니다. 들숨날숨이 그렇고 먹고 싸는 것이 그러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러한 얽힘 속에서 뒹굴며 엮어져 가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이미 그러한 얽힘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같고 혼자만으로도 거기 그렇게 고색창연하게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도 사건이시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 ‘자기라는 인간’도 사건입니다. 

하니 이제는 고정성의 분위기를 떨치지 못하는 ‘자기동일성’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겉보기처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그 인간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이런 입장들이 대단히 달라 보이지만 자기라는 인간에 좀 더 정직하다면 그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영속하려는 욕망 때문에 자기는 언제나 동일한 실체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 잡혀 이를 무의식적으로까지 전제하려 하니 상황이 애초부터 꼬이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고 믿음이 그렇고 종교가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영속한다는 ‘자기’란 기실 신기루 같은 것인데 그저 없는 것을 붙잡고 꾸려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이제는 좀 더 정직하고 과감하게 자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가 얽힌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풀어낼 실마리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⑦
 
몇 차례에 걸쳐 서론을 나누었던 글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는 여러 종교들이 함께 있는 상황을 살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락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그것도 그저 추상적 인간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라는 인간’을 살피자고 했습니다. 삶의 모든 면들이 그러하지만 종교에서 이게 더욱 진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되돌아 새기곤 했습니다. 충분하진 못해도 어느 선에서는 이야기를 옮겨가야 하기에 인간 이야기를 일단 마무리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덮어놓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성찰이 모든 종교 이야기에 착실하게 깔려야 할 터이니 필요한 때마다 다시 끌어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게 다종교세계를 보는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다종교세계’는 여러 종교들이 함께 공존하면서 혼재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종교이니 사람들은 그런 여러 종교들을 놓고 비교도 하고 사이가 어떤지에 대해 관심하게 됩니다. 사실 심심치 않게 종교들이 갈등하고 충돌하기 때문에 이런 관심은 한가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종교들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는 그저 지적 유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종교간 관계’라는 말이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게 새삼스럽다는 것은 옛날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가 요즘 와서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계’라는 말이 오늘날에는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계’라는 말이 특히 그리스도교의 배경이 되는 서구문화사에서는 더욱 생소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역사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진했습니다. 
 
고전적으로 보면 ‘관계’는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무엇인가 영속하는 것을 붙잡으려는 종교적 동기가 신화를 거쳐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을 엮어내었으니 이 과정에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고 다른 것들과의 얽힘이라는 것은 이에 따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10개의 범주로 세계의 근원에 대한 정체규명을 시도할 때 영속하는 실체에 대해 관계는 그저 우연한 성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근세로 넘어오면서 인간이 둘러싼 세계를 대상으로 설정하는 주체로 부상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라고 하는 구도가 기본적인 사고틀이 되었습니다. 관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관계이긴 한데 그 시작이 주체와 객체의 관계인지라 당연하게도 객체에 대해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일방적인 관계가 되고 말았지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니 주관주의라고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그 이전 고중세 시대는 세계, 또는 신이 우선적인 지위를 지녔고 인간은 아직도 세계나 신을 그대로 보아내는 입장이라는 데에 머물렀기에 주도권이 세계, 또는 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세와 비교하자면 굳이 객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관주의든 객관주의든 모두 일방적인 관계방식입니다. 말하자면 한 쪽이 주도권을 쥐고 다른 쪽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지요. 이게 잘 나갔으면 계속 그렇게 갔을 터인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본디 일방적이라는 게 오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해서 결국 주도권의 횡포를 피할 길 없는 일방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사실 주도권을 지닌 일방이라는 것이 대체로 ‘가진 자들’의 횡포일 터이니 견디다 못한 ‘못가진 자들’이 이에 대해 항거하고 절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겠지요. 해서 우리 시대인 현대에 이르러 일방성을 넘어서는 쌍방성 또는 상호성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타자성, 혼종성 등등 오늘날의 화두는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관계’라는 말이 지녀 마땅한 본 뜻을 점차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 아직도 우리에게는 이 ‘관계’라는 것이 생소합니다. 먼저 내가 있고 후에 남과 관계한다고 생각하는 관습에 오랫동안 젖어 살아왔는데, 오늘날 관계라는 것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 삶을 엮어가고 있다고 하니 어리둥절하고 나아가 도리어 저항하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보건대, 우리는 이미 관계의 산물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정신문화적으로도 이미 그러합니다. 인간이 관계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 삶이 관계로 엮여 있습니다. 영속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관계가 우리의 뿌리이고 줄기이며 몸통이고 열매라는 말입니다. 하면 인간과 그리도 뗄 수 없는 종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관계는 인간과 종교의 정체 분석을 위한 핵심적인 뿌리개념입니다. 이제 다종교세계의 틀인 ‘종교간 관계’라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마땅하지요. 그리고 이런 관심을 신학적으로 추린 분야가 바로 ‘종교신학’입니다. 해서 여기에서는 ‘종교간 관계’를 기축으로 하는 ‘종교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물론 종교신학은 다종교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야할 길에 대해 모색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이 분야의 이름은 ‘종교’와 ‘신학’이라는 말이 붙은 것입니다. 연관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비슷해 보이기도 하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종교와 신학의 관계는 과연 어떠합니까? 신학의 긴긴 역사에서 ‘종교신학’이 신학의 한 분야가 된지는 불과 반세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굳이 따져 보면 2천년 중의 50년이니 1/40 정도입니다. 20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종교신학은 영어로 쓰면 theology of religions,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종교들에 관한 신학’입니다. 그러나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다른 종교들에서는 종학 또는 교학이라고 부르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Christian theology of religions, ‘종교들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는 다종교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자기정체성과 타자관계성을 어떻게 엮을 것인가 하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려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종교신학’이라는 말이 지닌 역사가 짧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다종교상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볼 때 현대 이전에 행해진 적이 없습니다. 현대가 시작되는 19세기 중엽부터 싹이 트더니 20세기 중엽에 비로소 구체적으로 제기된, 시대적 요청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서 등장한 신학의 한 분야입니다.  
 
좀 더 자세히 봅시다. ‘종교신학’ 혹은 ‘종교들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종교’라는 말, 더 나아가 ‘종교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학은 어떤 신학입니까? 이슬람 신학, 유대교 신학도 아닌 그리스도교 신학입니다.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종교’라는 표현, 더 나아가 ‘종교들’이라는 표현을 요즘은 다소 자연스럽게 쓰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종교’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인지는 한 세대가 채 되지 않습니다. ‘종교’라는 표현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언제, 어떤 식으로 등장했고 자리매김 했는지를 되돌아본다면, 대표적으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종교의 의미와 목적』을 살펴볼만합니다. 이 책 이야기를 잠시 해볼께요. 스미스는 물음을 던집니다. ‘종교’라는 명사와 ‘종교적’이라는 형용사 중 무엇이 먼저였을까요? 문법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명사가 있고 거기에 ‘~적’이 붙어 형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문명사의 과정에서는 ‘종교적’이라는 형용사가 먼저였으며 ‘종교’가 명사적인 실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저작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표현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속에서 지금 통용되듯이 사용되어 왔다고 가정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교가 태동했을 때는 주변에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교들과의 싸움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즉 ‘호교론’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는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종교들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갔습니다. 이는 사도들은 물론이고, 교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외적인 호교론으로 밖의 문제를 추스르고 나서 교부들은 이제 안쪽으로 눈을 돌려 안을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소위 ‘교부학’입니다. 이처럼 대외적인 호교론과 대내적인 교부학은 분명하게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교론이 먼저고 교부학은 그 다음입니다. 밖을 먼저 의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중세로 넘어가면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라 군림하고 지배하는 교황의 종교, 황제의 종교가 됩니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세우고자 했으며, 그러한 동기 하에 체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소위 ‘교부신학’에서 ‘스콜라신학,’ 교부들의 신학으로부터 학자들의 신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면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유일한 종교가 되자 더 이상 ‘종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고유명사가 ‘종교’라는 보통명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는 언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한 예를 들겠습니다. 1961년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수년 후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대학 4학년 때 10.26 시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초, 중, 고, 대학의 교육기간을 박정희와 함께 보낸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박정희는 고유명사였지만,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대치할 수 있는 보통명사이기도 했습니다. 교육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나라님’의 이름은 곧 ‘나라님’이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저에게 박정희는 보통명사이자 고유명사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요즘에는 그런 표현을 잘 쓰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몽고의 서울이 어디냐?’는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서울’이라는 고유명사는 수도라는 보통명사를 대치합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이것과 비슷한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고대로부터 중세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리스도교의 등장이지만, 중세로부터 근세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의 등장입니다. 과학의 등장은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지리상의 새로운 발견은 다른 문화, 다른 종교를 만나게 했습니다. 이러한 ‘다름’들을 만나면서 황제의 종교, 교황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보인 1차적인 반응은 ‘다름’을 배제하는 것, 즉 배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근세의 시작은 ‘배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타자가 없다가 타자가 생기니, 일단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렇게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싹텄고 경험이 축적되면서 타자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그 관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방식으로 사고의 틀이 바뀌었습니다. 18세기는 ‘사회의 세기’이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 일어난 소위 사회명목론, 사회실재론은 중세 때 일어났던 보편논쟁에서의 실재론 대 명목론의 사회적 재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논쟁들은 결국 타자의 위상을 다시금 설정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급기야 ‘역사의 세기’인 19세기에 들어서는 역사의 진행과정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 진행과정은 ‘점진적 발전’으로 파악되어 종교 역시 발전의 도상에서 단계적으로 파악되면서 타자와의 관계에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이전에 떠올리지 않았던 범주들이 등장하면서 관계에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대 중세는 ‘초자연’이 기본 범주였지만,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자연’으로 범주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자연’이 기본 범주가 되면서 인간이 겪어냈던 그 과정 속에서 더 이상 타자는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경험의 축적이 사회로, 역사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그것이 18-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타 관계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엮어졌습니다. 그랬을 때 유일한 ‘하나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하나’라는 것에 결정적인 위협을 받았고 하나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할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종교적’이라는 형용사는 명사적인 실체화의 과정을 전개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어의적으로 ‘종교’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이 맥락에서 여러 종교들 사이의 관계라는 새로운 시대의 과제를 요청받아 실체적인 뜻으로, 명사로서, ‘종교’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근세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로서는 뼈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여러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두 단계의 충격을 받았는데, 일차적인 충격은 ‘그리스도교’라는 표현에 ‘종교’라는 보통 명사를 들이대었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학문으로서 종교학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저 한 세기 반밖에 되지 않은 셈입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교’라는 고유명사에 대해서 ‘종교’라는 일반명사를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즉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황을 접하게 된 것도 이천년이라는 긴 역사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짧다고 할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종교’라는 말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종교학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데에는 이런 연유도 작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차적인 충격에 이어 이차적인 충격은 ‘종교’가 그저 보통명사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종교들’이라는 현상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종교’로 부르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데 게다가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으니 갈수록 태산이 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교는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교신학은 바로 이 문제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을 겪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신학은 여전히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업을 먼저 시작한 것은 당연히 서구인들입니다. 여기서 ‘당연히’는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함’을 의미합니다. 서구인들이 그리스도교 자체를 옹호하고 정립하기 위해, 일종의 거래 논리로 종교신학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진되면서 나름대로 한계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를 말하면서도 너무도 서구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도적이기도 했지만 아주 오래된 습관이어서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1세대 종교신학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 제2세대 종교신학입니다. 2세대 종교신학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비서구에서 개진되는데, 나아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교 영역에서도 펼쳐집니다. 한반도의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는 시대적으로나 상황적으로도 제2세대 종교신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제1세대 종교신학이 개진해 온 이야기를 먼저 살피고, 그 다음 비서구권, 비그리스도교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2세대의 종교적 성찰까지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1세대 서구 그리스도교인들이 개진한 종교신학의 첫 번째 단계, 즉 타자를 만난 뒤 일어난 첫 번째 반응은 앞서 잠시 언급했듯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생리적인 본능입니다. 배타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배타는 본능입니다. 여기에 무슨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본능에 계속 이런저런 비본질적이고 비당위적인 옷이 입혀지기 때문에 옹호되고 정당화되는 과정들이 문제시되고 반성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 사회, 역사라는 범주를 거치면서 배타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싹텄고, 타자를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가치라도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서 ‘포섭’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 바로 ‘포괄주의’입니다. 100점짜리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80점짜리 종교인 불교, 60점짜리 종교인 이슬람교, 20점짜리 종교인 샤머니즘을 다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식입니다. 다만 이 종교들은 한참 모자라니 그만큼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한 줄로 세워놓는 방식에 대해 현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반향이 일어났고, ‘한 줄에서의 높낮이 가늠’이 아니라 ‘여러 줄 세우기’라는 주장이 등장하는데 포괄주의가 여기까지 가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전개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물론 다원주의라는 말은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버전으로 보자면 배타주의, 포괄주의에도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버전들이 지닌 다양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원적 다양성의 버전들이 다원주의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비서구이면서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 안에서 그리스도교 인구는 천주교와 개신교, 정교회를 다 합쳐봐야 1/4입니다. 3/4은 비서구이며 비그리스도교인인 것입니다. 비서구이면서 비그리스도교적인 문화권 아래 비서구 그리스도교도인 한국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종교 간 관계구성의 바람직한 모형은 어떤 것일까요? 2000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리스도교가 곧 종교이고 종교가 곧 그리스도교였던 서구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종교적 정체성 정립을 위해 만들었던 종교신학의 배타, 포괄, 다원 이야기를 그대로 에누리 없이, 여과 없이, 변형 없이, 채색 없이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종교신학 2세대의 작업에 더 깊고 밀접하게 관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종교신학의 정체와 배경, 1세대에서 2세대에 걸친 모습을 대략적으로 개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할 이야기를 대략 개괄해 보겠습니다. 먼저 할 것은 종교간의 관계 유형의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입니다. 여기서는 1세대 이야기, 즉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개진된 종교간 관계에 대한 유형을 다룹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다루는 것은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은 배타주의입니다. 배타주의로 통칭되는 그룹이 자기 스스로를 배타주의라 부르겠습니까? 그것은 소위 정통에서 소위 사이비라 부르는 동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사이비라 부르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입장은 그 입장대로 적극적으로 읽어야 마땅하므로, ‘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이 흐름도 세밀히 살피자면 20세기 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 복음주의 논쟁의 중심에 서서 ‘종교신학’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하면서 미리부터 그것을 평정하겠다는 헨드릭 크레머의 방대한 작업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도 현재 활동하고 있는 최신의 복음주의를 살핀다는 의미에서 알리스터 맥그레스의 저작을 살핍니다. 포괄주의 흐름을 알기 위한 텍스트로는 김승철 교수가 번역하여 편집한 슈바이처, 트륄치, 라너의 논문을 살핍니다. 다원주의에 관한 텍스트로는 폴 니터의 글을 살핍니다. 이렇게 해서 1세대 이야기, 서구 그리스도교가 전개한 소위 세 가지 유형을 살핍니다.
 
그 다음으로는 제2세대, 비서구 비/그리스도교의 이야기를 살핍니다. 여기서는 라이문도 파니카의 텍스트를 읽는데, 파니카는 힌두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를 오락가락 했습니다. 비서구 그리스도교인이었다가 비서구 비그리스도교인이었다가 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삶 속에서 일종의 종교적 실험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씨름이 반영된 그의 텍스트 속에서 우리는 1세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 대목에서 할 것이고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에게서 엄청난 지혜와 깨달음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이와 호응하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들도 함께 살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간략하게나마 앞으로 전개할 각론에 대한 개괄을 해 보았습니다. 이제 서론을 마무리하고 다음부터는 각론으로 들어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0번째
 
1. 복음주의/배타주의(1) 
 
▲정재현 연세대 교수. ⓒ베리타스 DB
앞에서 종교 간 관계 유형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비교하면서 각 유형의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을 간단하게 살폈습니다. 논리적 근거는 씨줄에 해당하고 역사적 배경은 날줄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논리적 근거와 역사적 배경’이 가로와 세로라는 것은 이것이 임의로 고른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 말에는 세 가지 유형에 대해 구조와 역사를 한데 엮는 체계적인 분석을 하겠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논리적이고도 역사적인 순서대로 배타주의로 분류되는 복음주의부터 살펴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다름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근세에 와서의 일입니다. 그런데 만남의 시작은 일단의 거부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16-7세기는 배타주의(이전에는 ‘배타’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가 지배적이었고, 18-19세기 포괄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 다원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의 전환이 진화나 발전이라고 미리 질러 짐작하고는 배타주의보다 포괄주의가, 포괄주의보다 다원주의가 더 우수한 유형이라고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인 전개 과정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나중에 나온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문에 ‘논리적 근거’가 중요한 것입니다. 논리적 근거는 통시적인 흐름에서 역사적인 과거로만 치부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것을 공시적으로 끌고 나옵니다. 연대기적으로는 그랬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각 입장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사조로, 그래서 엄연히 하나의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좋은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세로축에 대한 고려 없이 가로축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연구실의 임의적인 조작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로축 뿐 아니라 가로축을, 가로축 뿐 아니라 세로축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복음주의 유형을 대표하는 자료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와 그리스도교적 지성』(IVP, 2001)을 살피겠습니다. 앞으로 살필 유형들의 분량에 대해 형평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1장과 5장만을 보려 합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장과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선 살펴야 할 것은 맥그래스가 16-17세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는 ‘복음주의,’ 즉 ‘배타주의’의 입장에 서서 그 이후의 시대와 그 시대적 사조들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후에 개진되는 그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맥그래스의 핵심주장은 무엇인가요? 장의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절대적인 존재이고 하나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성육신이라는 방식으로 현현하셨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유일성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성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유일성’이라는 주장을 끌어내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를 엮어내고 있을까요? 조금 달리 묻는다면 이 저작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전제인가요? 결론인가요?  
 
책으로 들어가 봅시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의 주장을 집약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냅니다.   
 
복음주의는 단지 그리스도의 유일성(uniqueness)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성(definitiveness)을 강조한다. 하지만, 전자를 고백하는 것은 후자를 옹호하기 위한 중요한 첫 단계이다.(29)  
 
유일성은 시작에서의 언어이고, 궁극성은 끝을 마무리하는 언어입니다. 유일성이 이미 전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일성과 궁극성을 포괄주의나 다원주의와도 소통되고 비교가 가능하도록 다른 어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성을 특수성으로, 궁극성을 보편성이라고 바꾸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일성에서 출발해서 궁극성으로 간다는 것은 특수성에서 출발해서 보편성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이천년 전 나사렛’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의 점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는 특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사건이 특수한 공간과 시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초시공적인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특수성을 자리매김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보편성에 이를까요?  
 
‘유일’은 문자 그대로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맥그래스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인 것이 그리스도에만 국한됩니까? 싯다르타도 오직 하나고, 공자도 오직 하나이며, 소크라테스도 오직 하나고, 모두가 다 오직 하나입니다. 여러분도 오직 하나이며, 쌍둥이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유일성은 어떻게 궁극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다양한 유일성 중 하나인 자신의 입장이 궁극적으로, 즉 최종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거나 선포하는 데 아무런 거북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결정적이고 확실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토대를 근거로 ‘특수성의 문제’(scandal of particularity)에 대해 불평하는 이들도 있다. (30, 이하 책의 쪽수만 표기)  
 
여기에서도 ‘보편’과 ‘특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음의 문장은 더욱 압축적인 선언입니다: “복음주의는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특별 계시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고수해 왔다”(30). 이러한 표현은 다음 쪽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 계시의 특수성을 고백함으로써 복음주의는 이제 보편타당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념을 유지하면서도 토대주의의 인식론적 곤경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31). 이처럼 복음주의는 특수성에서 시작하여 보편성으로 나아갑니다. 특수성을 전제하고 시작하지만 보편성으로 확장합니다. 유일성이라는 이름의 특수성이 모든 것을 평정하는 궁극성을 지닌다고 함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합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이동은 개별을 전체로 확장함으로써 시도됩니다. 고전형이상학은 신과 우주를 포함하는 ‘전체’를 설정하고 신을 그 정점에 모시면서 세계를 설명하고 인간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복음주의는 바로 이런 세계관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려내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의 존재는 인간의 사유와는 별도로 독립적인 실재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동어반복적으로 이해합니다. 애써 사람이 되신 까닭을 곱씹기보다는 그 분이 신이라는 데에로 초점을 집중합니다. 그러니 특수이긴 하지만 특수가 아닙니다.
 
모양만 특수이지 정체는 특수가 아니니 사실 특수에 머물러 그 뜻을 새길 겨를도 없습니다. 특수는 바로 보편입니다. 껍데기인 특수를 벗겨내면 알맹이인 보편이 이내 드러난다는 식이지요. 그러니 다른 특수들, 즉 개별적이기만 한 특수들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보편으로 드러날 특수와 달리 개별적이기만 한 특수한 것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는 배제되는 것이지요. [포괄주의는 반대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갑니다. 다원주의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보편성에서 특수성으로 가는 이 두 방향을 모두 깨뜨립니다. 두 방향 모두 다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는 일방의 구도가 아니라 쌍방의 구도로 그 논리를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어떻게 특수와 보편, 개별과 보편의 관계를 가질 것인가요? 일단은 물음으로 남겨둡시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보편인 특수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복음주의에 대한 일차적인 시비는 근세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그것도 근세정신의 대중화라고 할 계몽주의에서 그 시비는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사상입니다. 16-17세기는 근세 전기, 18-19세기는 근세 후기입니다. 같은 근세지만 이 둘 사이에는 사고방식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근세 전기는 인간이 인식 주체로 등장하고 고전형이상학이 옹립하던 실재를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이 관계를 살피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를 인식론이라고 하지요. 인간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관심합니다. 그런데 근세후기에는 인식 주체인 인간이 토대가 되고 실재와 방법이 엮입니다. 가히 인간중심주의가 완성된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런 구도 안에서 실재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시 하기에 형이상학의 복고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을 주체로 놓고 하니 관념론이 지배적입니다. 계몽주의는 이 둘 사이에 위치합니다.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계기이고 동인입니다. 인간이 세계를 보는 토대가 되는 단계의 서주입니다. 계몽주의란 엘리트들만 주고받던 ‘잘난 인간’ 이야기의 찬란한 빛을 아직도 흑암에서 헤매는 대중에게 비춰주겠다는 것입니다. 세속화의 본격적 세계화라고나 할까요. 인류문화사에 지대하게 이바지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이를 거쳐서야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는 인간해방을 향한 이런 도도한 흐름을 외면하고 억제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구체적 종교들의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구태여 들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몽주의에 대해 맥그래스는 언급합니다: “[근세인들은] ‘이성,’ ‘경험’ 혹은 ‘문화’와 같은 보편타당하고 접근 가능한 규범 혹은 자료에 기초하여 종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왔다”(30). 여기서 맥그래스가 언급한 ‘이성,’ ‘경험,’ ‘문화’는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 요소들은 현대신학 방법론에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이에 반해 고전신학 방법론에서 중시되는 요소들은 무엇인가요? 계시, 성서, 전통입니다. 17세기까지는 고전신학의 3요소가 중시되었는데,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면서 ‘이성,’ ‘경험,’ ‘문화’와 같은 요소들이 신학 방법론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은 맥그래스의 고유한 시선이 아니고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좀 더 상술하자면 근세 후기에는 ‘이성,’ ‘경험’이라는 요소가, 20세기에는 ‘문화’라는 요소가 신학방법의 주요구성요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문화를 포함해서 이런 요소들이 이 때 처음 등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삶에서 작동해 왔지만 인간 스스로를 이해하는 범주에 ‘문화’를 염두에 두게 된 것이 현대에 와서의 일입니다.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은 앞의 전통적인 세 요소들을 끌고 와 새로이 등장한 세 요소들과 묶습니다. 여섯 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고, 이 중 몇 개를 골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눈으로 복음주의를 보니 특수에서 보편으로 가는 것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시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시비했을까요? 31쪽으로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라는 작은 제목이 붙은 글이 나옵니다.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근세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열거합니다. 일단 칸트가 먼저 나옵니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이성은 그리스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다”(32). 칸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예수 그리스도 자체에 두지 않고, 도덕적 이성이라는 인간의 기준에 맞추어서 본다는 것입니다. 즉 도덕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에 들이대고 그 틀에서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인정합니다. 레싱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게,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자인 레싱(G. E. Lessing)의 기독론 저서들에서도, 이성의 일차적 권위를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32). 허나 복음주의에서는 이러한 시도들을 보면서 근세 사상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보편이성을 믿고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이들은 계몽주의가 표방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면 합당한 것이고, 충족시키지 못하면 합당하지 못하다는 판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상가들을 맥그래스는 “문화의 노예가 된 사상가”(33)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문화라고 통칭하는 것은 이성, 도덕 등인데 이것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시대정신입니다. 맥그래스가 보기에 칸트, 레싱은 다 문화의 노예입니다. 이후 <예수전>을 쓴 르낭이나 쉬트라우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