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구성원이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by dschoiword posted Feb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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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구성원이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크리스천투데이, 2015.2.16. 기사

 

[슬로우 리뷰] 양희송 대표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

이정규 강도사님(시광교회)의 2월 첫 ‘슬로우 리뷰’ 선정 도서는 양희송 대표(청어람아카데미)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포이에마)>입니다. 이 강도사님은 “제가 쓴 서평 중에서 아마 가장 신랄한 비판을 담은 글인 것 같다”며 “비판과 반론은 늘 언제나 환영이고, 논지의 많은 부분은 케빈 드영의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소개했습니다. -편집자 주

 

 

책 소개

 

제가 알기로, 국내에서 가나안 성도(‘안 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조어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이것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본서는 청어람아카데미의 양희송 대표가 쓴, 과감하고 강력한 ‘시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제가 ‘시각’을 담은 책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 책이 화두의 제시와 분석은 있지만 대안은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 현상(가나안 성도 100만)과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양 대표 자신의 ‘시각’만 존재합니다. 물론 재미있게도(그리고 어이없게도), 책 내용은 전혀 가나안 교회 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책 뒤 표지의 추천인 두 분은 이 책이 ‘대안을 만들어’가며 ‘대안에 깊이 동감한다’고 말하긴 했지만요.

 

책의 내용은 크게 3부로 나뉩니다. 1부는 ‘가나안 현상학’입니다. 여기서는 조성돈·정재영 교수의 2013년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요약하며, ‘가나안 성도들’이 누구이며 왜 교회를 가지 않게 되었는지(1-2)와 가나안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1-3)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특히 저자는 1-3에서 가나안 성도를 단순히 ‘교회 쇼핑족’이나 ‘교회 난민들’, 그리고 ‘영적 엘리트주의자들’이나 ‘영성소비자’, ‘잃어버린 양’으로 보는 것을 경계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인식이 ‘전형적인 오해(56쪽)’라고 말하며, 결론적으로 가나안 성도들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더욱 잘 살도록 재촉하는 것(또는 삶 70쪽)”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2부는 ‘가나안의 사회학’입니다. 첫 부분에서 저자는 14.2년 정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그들이 왜 교회를 떠나는지에 대해 ‘숨막힘(아마도 권력구조로 인한)’과 ‘위선’, 그리고 ‘분쟁’ 등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공동체(예를 들면, 벙커원교회)들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어쩌면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인용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즉, 한국교회는 ‘구원의 확신’부터 시작해 단계적 양육을 거쳐 그 결론을 ‘전도’와 ‘선교’로 삼는 아이용 기독교에 머물러 있었고, 그 결과는 신앙의 더 깊은 성장을 가로막고 체제순응적 인간형을 양산하는 데만(135쪽) 소용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는 성장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구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성인용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3부는 ‘가나안의 신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가나안의 신학, 즉 ‘제도적 교회 바깥에서도 에클레시아가 가능하다’는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는 교회론 논쟁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제도’라는 것이 과연 신앙을 보존하는 데 효과적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교제(코이노니아)와 이웃을 향한 사랑(아가페)를 발휘하는 삶이 이루어지는 ‘장’이고, 심지어 역설적으로 에클레시아란 이름을 달고도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제도는 에클레시아에 가장 적대적인 장애물이 된다고 말합니다(164-166쪽).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회심해야 하는 어린 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도에 갇혀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에클레시아(교회)를 향한 저항과 탈출의 몸부림을 하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들의 신앙이 ‘성 안의 신앙’이 아니라 ‘길 위의 신앙’이며, 미지의 신앙이고 이웃이 되어주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핵심 쟁점: ‘제도’도 교회(에클레시아)의 일부인가?

 

다시 양 대표의 말을 이해하기 쉽게 옮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을 길 잃은 어린양 취급해선 안 된다. 오히려 교회의 ‘기능’이 ‘제도’ 때문에 무너졌기 때문에, ‘제도’ 바깥에서 ‘기능’을 수행하려는 신앙인들일 수 있다”입니다.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교회의 제도가 기능을 담기 위한 그릇일 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걸 다른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기능(또는 사명)만을 주셨을 뿐, 특정 제도는 주시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자는 ‘공동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상적인 ‘에클레시아’라는 공동체가 지금의 조직과 권위가 있는 제도 교회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제도적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지 않고 소속되어 있지 않다 해서 그를 신앙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저자인 양 대표가 이끌고 있는 ‘세속성자를 위한 수요모임’ 같은 곳에서 신학과 삶을 나누면서, 세상을 향한 사랑과 봉사를 나누는 것도 충분한 신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약성경이 이런 형태의 신앙을 승인한 적도, 심지어 상상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이 쓴 서신들은 직분도 제도도 없는, 커피숍과 같은 문화공간에서 수요일에 모여 신학과 삶을 즐거이 나누는 집단을 향해 쓴 책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교회에서 장로들에게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딛 2:15; 딤후 4:2)하라고 말하며, 교회를 다스리고(행 15:2; 20:17; 딤전 3:1-7, 5:17; 벧전 5:1), 성도들에게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히 13:17)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클레시아에 기능 뿐 아니라 제도도 주셨습니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말합니다. 각자는 은사에 따라 봉사해야 하며, 봉사할 거리는 차고 넘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들어야 하며,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도 없이는 기능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 점을 헤르만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무정부주의는 말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조직이나 교회정치, 또는 권위 없이 교회를 세우셨다는 주장은 철학적 신비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원리들에서 나왔지만, 성경의 가르침이나 실제 삶의 현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말이다.”


-Herman Bavinck, John Bolt(ed), Reformed Dogmatics IV: Holy Spirit, Church, and New Creation(MI: Baker Academic, 2008) p. 413512

 

‘인터뷰’ 대상이었던 가나안 성도는 과연 일반적인가?

 

이 문제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길을 찾아 제도적 신앙을 떠나는 가나안 신앙인’들이 정말 일반적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자는 책 초반부(22-34쪽)에 ‘교회는 떠났지만 신앙생활은 더 윤택해진’ 기독교 단체의 중견 책임자인 한 ‘가나안 성도’의 예를 소개합니다.

 

그는 현재 제도적 교회를 떠난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주일 11시 15분에 도넛 가게에 도착해서 도넛과 커피를 시켜 놓고 한 시간 정도 독서를 하며, 12시 15분에 가족들과 점심식사를 합니다. 그래도 주일학교의 필요성은 인정하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인근 교회에 다닙니다. 그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에 대한 어떤 설득력 있는 대답도 들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당신들은 왜 아직 남아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가나안 성도일 수 있을까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기독교 단체의 중견 책임자’입니다. 주일에 도넛 가게에서 책 한 권 읽을 만한 정도는 되는 신학적 식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교회를 14.2년 다녔지만 6개월 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은, 한때는 교회의 중심부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지금은 여러 문제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 ‘기독교 신앙의 문화나 콘텐츠를 전혀 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저자는 조성돈·정재영 교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가나안 성도들의 특징을 보고, 그 양상이 대부분 위의 기독교 단체 중견 책임자와 비슷할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은 모두 이와 같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지요. 저자는 마치 가나안 성도들의 대부분이 ‘미지의 신앙을 찾아 탐험하는 신앙인’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가나안 성도들은 오히려 ‘다시 돌아와야 하는 잃어버린 양’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대부분이 14.2년을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의 중심부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핵심층이었으며,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자유로운 신앙생활(30%)’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이 꼭 ‘바른 신앙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1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참된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게다가 그 기독교 단체 중견 책임자의 신앙은 ‘괜찮은’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미안하지만 어느 쪽이 더 어렵습니까? 한 기독교 단체의 중견 책임자로서 주중에 신앙과 연관된 여러 일을 하고 신앙 양서도 읽으면서 교회를 ‘아직도’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왜 아직 남아 있습니까?”라고 비난하며 ‘윤택한’ 주일을 도넛가게에서 보내는 것과, 그 가나안 성도의 아내와 자식들이 다니는 교회학교 부장집사로서 한편으로는 꼰대 같은 사고방식과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자녀를 키우고 성가대를 하며 십일조와 기타 헌금을 내면서 주중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에서 상사에게 욕을 매일 먹으며 야근하고 파김치처럼 퇴근하지만 ‘숨 막히고, 위선적이며, 분쟁이 있는’ 인근 교회를 섬기는 것. 둘 중 무엇이 더 어렵습니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전자를 ‘길 위의 신앙’이며 ‘이웃이 되어 주는 신앙’이고 ‘미지의 신앙’이라 포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전자를 후자보다 더 ‘생각 있는’ 신앙인인 양 묘사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저자는 가나안 성도들을 위한 신학강좌를 만들고 대안처럼 이야기하지만(134쪽), 미안하게도 평일 오전 8시면 출근해 오후 10시나 되어서 퇴근하며, 토요일 오전에는 뻗었다가 오후에는 아이 셋을 데리고 외출해야 하는, 그러다가도 주말에 상사에게서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회사로 달려가야 하는, 서울의 30대 직장인 아버지들은 그 강좌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전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을 읽고, 양 대표의 ‘평신도를 위한 교양신학’을 들으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모여 신앙을 이야기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세상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나이와 생각의 차이도 크고 환경도 신학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는 없을 것이고, GBS 때 횡설수설하여 논점을 파악하기 힘든 한 형제의 간증을 참고 들어야 할 일도 없을 것이며, 3년 동안 교사로 가르쳤던 아이가 대학에 가서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할 때 느끼는 절망감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현장이 없는 상황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럼에도 웃기는 것은(그리고 화가 나는 것은), 전자의 기독교인들이 후자의 기독교인들을 비난할 뿐 아니라 바보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언: 제도에서의 탈피가 아닌, 제도적 교회의 개혁이 답이다

 

 

사실 가나안 성도를 보는 이 책의 시각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며, 미국에서는 이미 레너드 스위트나 조지 바나 같은 인물이 주장하여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한물간’ 이론입니다. 이미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이러한 이론이 잊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한 교리에 대하여 <왜 우리는 지역교회를 사랑하는가(2010, 부흥과개혁사)>에서 밝힌 바 있지요. 그것은 놀랍게도 원죄의 교리입니다(254쪽, Deyoung).

 

양희송 대표는 누군가 ‘제도적’ 공동체를 떠나도 충분히 신앙이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공동체만 있다면, 그것이 ‘제도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군가 죄를 저지른다면, 특히 공동체 내에서 죄를 저지른다면, 누가 권징합니까? 가르침은 누가 줄까요? 아무나 가르쳐도 됩니까? 아니, 가르침이 없어도 괜찮습니까? 벙커원교회처럼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 의견을 나누어도 될까요? 그 의견 중에서 온갖 이단적인 내용이 판쳐도 말입니까? 신천지가 와서 자기 성경해석을 나누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쫓아내야 하는 걸까요? 무슨 권위와 무슨 제도와 무슨 합법성으로 그들을 쫓을까요?

 

우리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인 정도가 아니라,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늘 펠라기우스주의로 정죄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주셨고, 그 구원 안에는 ‘제도적 교회’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도적 교회를 운영하고 회원이 되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제도적 교회, 즉 가시적 지역교회는 타락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2천년 동안 제도적 교회를 통해 말씀을 공급해 주셨고, 서로를 돌보게 하심으로써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신만 주신 것이 아니라, 형태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면,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어떤 형태가 없어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펠라기우스주의자가 내리는 결론에 불과합니다(물론, 양 대표가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직도 제도적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제도적 교회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권력욕이 있고 수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제도적 교회가 죄인인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이며, 비록 지금 죄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승리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 대표가 제도적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제도적 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합니다(187쪽). 하지만 제도적 교회를 ‘떠나 있는 것’도 괜찮은 신앙의 상태라는 결론은, 제도적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너희 떠나도 괜찮으니까 정신 차리고 잘해” 정도의 겁주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차라리, 이미 성경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타락한 제도적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지속적으로 부르짖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이런 의견이야 이미 한국교회에 지치도록 많이 나왔으니 거의 전혀 새로울 것이 없긴 하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모자란 것은, 담론이라기보다 실천일 것입니다. 저자는 대안을 말하지 않고,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시각으로는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목사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목숨 걸고 목양하는 장로들, 그리고 교회의 살림과 구제에 열심을 내는 집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제도적 교회’가 많아지기를 소망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교회가 많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교회를 나가든 안 나가든 세상 모든 죄인들의 소망은 이러한 교회 안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이정규 강도사.

P. S. 서평을 쓰고 나니 좀 후회가 되는 면도 있고, 더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는 것도 있고 해서 글 남깁니다.

1. 좀 과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만 책 초반부의 인터뷰를 읽으며, ‘제도적 교회가 힘들지만, 가나안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의 결단이 비신앙적으로 매도되는 것 같아 글이 거칠어졌습니다. 수정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이 글은 ‘화난 글’로 내버려두기로 했습니다.

 

2. 그렇다고 제가 기존의 ‘제도적 교회’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제가 가장 역겨워하는 대상은, 교회의 고유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거나 수행할 생각이 없는데도, 제도 안에서 기생하는 직업적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에 대한 비판할 것이 없어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도 그 제도 안에서 지역교회의 녹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죄송해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제도적’ 지역교회의 일원으로, 또한 섬기는 자로서 저 스스로가 “가나안 성도를 양산하게 한 책임(더 정확히는 죄악)”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반성이 없다면, 오히려 이 글을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반성을 먼저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그저 죄송하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4. 이 글은 ‘가나안 성도’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나안 성도 현상을 바라보는 한 시각’에 대한 비판입니다. 글을 자세히 읽으시면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음에 글을 하나 더 쓰겠습니다.

 

5. (헷갈릴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양희송 대표님의 한 책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표한 것 뿐이지, 양 대표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저술과 청어람 사역, ‘세속성자’들을 위한 사역들 대부분에 지지와 공감을 보내는 입장입니다.

 

이렇듯 흠이 많고 모자란 글임에도, 이 글은 어느 정도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은 늘 환영이며,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정규 강도사(시광교회, ‘갈라디아서: 통합적 성경공부 시리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