헹복론/ 구모영

by dschoiword posted Nov 2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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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 / 구모영 (페북에서 옮김)


 

1. 들어가며


우리는 입버릇처럼 행복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그래서 인사를 하면서도 “행복하시죠?”라고....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행복하다기보다는 “그냥 살아갑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죠. 그리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참사랑의 의미를 생각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죠.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이 행복과 사랑을 다 누리고 산다면, 말 그대로 행복한 삶이겠죠.


그런데 최근 우리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복하냐?”고 질문을 한 일이 있는데, 그들의 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현상은 이러했습니다.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학과 사회발전연구소는 지난 3∼4월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천94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4년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 비교연구’ 결과를 공개했다(2014.10.1.) 이에 따르면 유니세프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를 모델로 한 영역별 행복지수에서 OECD 평균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74.0이었다. 2009년 64.3, 2011년 66.0, 2013년 72.5에 이어 꾸준히 상승하고는 있지만 조사가 시작된 지 6년째 OECD 소속 국가 가운데 최하위다.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초등학생의 43.6%가 ‘화목한 가정’을 꼽았다. 이어 ‘건강’(20.6%), ‘자유’(13.0%)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중학생도 ‘화목한 가정’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지만 비율은 23.5%로 줄었고 ‘성적향상’(15.4%)을 꼽은 학생이 많아졌다. 고등학생으로 올라가면서 행복의 제1조건이 ‘돈’(19.2%)으로 변했다. ‘성적향상’이 18.7%로 뒤를 이었고, 이어 ‘화목한 가정’(17.5%), ‘자유’(13.0%) 순이었다. 학년에 높아질수록 돈과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족이나 건강은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살률이었는데, 우리 한국은 세계적으로 거의 최고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3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숫자는 1만4427명으로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은 28.5명이었다. OECD 회원국의 인구 10만 명 당 평균자살률 12.1명에 비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다.


최근 3년간 서울시 SH 공사의 임대아파트에서 125명이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자살자 발생 빈도가 높은 임대아파트는 마포구 성산임대아파트로 2012년 한 해 동안 8명의 자살자가 발생해 서울시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의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데, 최고의 증가율을 보이는 경상남도의 경우, 2010년 인구10만 명 당 6.7명의 자살률이 2013년 27.9명으로 무려 4배 이상 늘었다. ‘전국 기초생활수급자 자살률’도 2010년 인구 10만 명당 14.3명에서 2013년 20.9명으로 급격히 증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지난 9월 30일 한 국회의원이 전국 16개 시·도교육청으로 부터 제출받은 '초·중·고 학생 자살현황'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난 9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부산지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은 54명(전국 630명)이다. 연간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13명(전체 8%)으로, 광주(16명, 전체 10%)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 많았다. 이는 전국 최저인 제주(4.5명, 3%)에 비해 3배 정도 높은 것이다. 부산지역 학생의 자살자 수는 학급이 올라갈수록 증가했으며, 특히 초등학생도 3명에 달했다. 자살 사유는 가정문제, 원인불명, 우울증, 성적 및 진로 등의 순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이상의 통계자료만으로 행복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 할 수는 다 없겠지만, 그럼에도 일면은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과 사랑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특히 철학자들이 말하는 기준은 어떤 것인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위대한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성경에서 보는 행복과 사랑에 대한 기준을 살펴보면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행복과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이해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펼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철학자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1) 철학자 Augustinus가 말하는 행복하지 못한 이유


그의 삶의 내용에 관한 설명을 생략했지만, 행복한 삶을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전의 삶은 참으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수사학 교수로서의 삶은 물론 육체적인 쾌락을 통하여 일시적인 만족으로 추구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 전제를 볼 때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참회록” 제10권에서 행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당신을 인하여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유일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스스로 그들의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며, 당신 안에서 당신 때문에 당신에게 드리는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 하나님! 당신은 나의 빛이십니다”(시 27:1). “또한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나의 하나님”(시 42:11)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한 삶입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행복이 아닌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는 모든 소망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두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및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바로 불행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세 가지를 그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의 문제로 그는 먹고 마심에 있어 자신의 식욕을 절제하지 못했으며,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양 속에서도 가사보다는 곡조에 자주 기쁨을 얻었으나 이는 때로는 귀로 말미암은 쾌락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합니다. 둘째, 매우 위험스러운 안목의 정욕의 문제로 우리 연약한 인생은 하찮은 일에도 호기심이 작용하여 자주 시험에 빠지고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생의 자랑의 문제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데”(약 4:6), 자신은 남으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유혹과 교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칭찬받기를 사랑함으로 인하여 결국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행이 아닌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유일한 그리고 안전한 안식처인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 철학자 중 사르트르와 하이데거라는 학자가 있는데, 이들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원리하에 무신론적인 인간 현존재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죽음에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 말하자면 실존을 강조합니다. 특히 하이데거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사르트르는 동일하게 인간의 실존은 신을 배격한 실존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창조가 가능한 존재로 봄으로써 신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인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인간의 불안의 문제, 소외의 문제를 스스로 초월이라는 것에 의하여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에서 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행복의 첩경임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요? 이제 또 다른 철학자들의 논의를 더 살펴봅시다. 

 

(2) 칸트가 말하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그리고 행복이란?


철학자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뒤,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모든 질문을 맺고 있습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칸트는 근대의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인식론을 확립한 대철학자입니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책을 통하여 감각적인 현상계에 대한 인식은 물론, 관념적인 세계라 할 수 있는 정신과 자유, 도덕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노력한 학자입니다. 특히 인간의 자유나 신앙, 그리고 도덕의 문제는 순수이성비판이 아닌 실천이성의 문제로 보면서, 궁극적으로 도덕철학을 확립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너의 의지의 격률이 보편타당한 입법에 합당하도록 행위하라.”, “너는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 “사람은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라는 정언적 명령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비판을 넘어, “판단력비판”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아름다움과 숭고의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대상으로 두고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고려하고, 나아가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움에는 자유적인 아름다움도 있는가 하면 부용적(附庸的) 아름다움도 있다면서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전자를 말하며 후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화단에 예쁜 장미가 피어 있을 때 우리 집 식탁에 장식을 해 두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꺾어가는 것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도덕률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그저 바라보는 것, 바로 관조(觀照)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숭고함이란 것에 대해서는 아름다움과 달리 어떤 대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도 없는 우리의 정신적 작용이라 봅니다. 물론 이 경우도 우리의 쾌감을 만족하기 위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듯이 숭고감 역시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기 때문에 숭고함 또는 숭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우리의 이성으로 평가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동요(動搖)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진동(震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행복하기 위하여 일을 해야 하며,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며, 나아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일이나 사랑이나 희망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때에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하게 되며,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하는 생각, 이는 논리적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리적 취향에 만족하고 자기 느낌을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학적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자기 자신이 모든 행동의 목적과 중심이 되고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는 일은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 이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결국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불행한 삶의 행태가 되는 것입니다.


(3) J. Bentham과 J.S.Mill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벤담과 밀도 행복에 관하여 그의 철학을 펼쳐나갔습니다. 특히 이들을 공리주의자라고 하는데, 이러한 공리주의의 제1원리가 바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입니다. 그런데 벤담은 다수의 행복을 기준으로, 행복의 양을 따지는 양적 공리주의자였습니다. 따라서 행복은 양에 관한 한 쾌락이 불쾌보다 월등히 많다면 이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밀은 행복이란 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 질까지 따져야 한다면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행복의 기준은 양이 아니라 바로 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견해에 대하여 무조건 양적 공리주의는 틀렸고 질적 공리주의는 옳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죠. 양을 무시한 질을 생각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도 배가 고플 때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말에 가난은 원님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벤담은 이기주의적인 공리주의라 본다면 밀의 공리주의는 이타적인 공리주의입니다. 따라서 그의 공리의 제1원리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겠지만,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황금률”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률이란 성경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너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한다는 먼저 남에게 대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이웃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행복은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일 때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눌수록 행복은 두배로 커진다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3. 성경이 말하는 참된 행복과 가치


(1)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한 인간의 사랑을 생각해보고자합니다. 성경기사에 보면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당시 이웃으로 보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당시 유대인들은 개로 여김)은 이 사람을 데리고 여관을 가서 치료를 받게 함은 물론 나중에 더 경비가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이 부담하겠노라고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이 예를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참 이웃이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참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선행을 행하게 된 데는 어떤 이유와 댓가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이 사람은 바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이 참 사랑을 실천한 자라 평하고 있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봉사의 의미


봉사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남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 섬김에는 역시 댓가가 돌아오는 경우에는 봉사라기 보다는 일을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참된 봉상의 모범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일제히 거절을 합니다. 감히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 그리고 그 봉사를 받는 다는 것이 너무나 황송하고 송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섬김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일제히 발을 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봉사의 모범일텐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봉사의 의미는 이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3) 산상수훈에서 가르치는 교훈들


마 5:38-39절에서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며 주님께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은 눈으로라는 말은 고대 근동의 복수법으로 이를 talio법칙(lex talionis)이라 합니다. 다만 이러한 법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 당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게 되면 그 상해를 입은 사람이 속해 있는 부족 전체가 그 상해를 입힌 한 사람이 속해 있는 부족 전체를 보복하는 상황이었고, 급기야는 상처가 아니라 그들을 살해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함무라비법전이나 성경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talio법칙을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자비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중동의 경우. 특히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이 법칙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팔레스틴의 약간의 침해에 대해서도 ‘되로 받고 말로 주는’ 법칙을 사용하고 있어 종종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약은 물론 신약에 이르기까지 보복을 원칙적으로 정당시 하지는 않는다. 정당방위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뺨을 맞는 것은 너무나 큰 모욕임에도 불구하고 왼편을 돌려대라고 함으로써,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하기 때문에 유태인의 법에서는 이는 두 배의 모욕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는 우리에게 해를 주는 자에게 결코 보복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 5:40절에서는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 두벌의 옷을 입습니다. 그들은 치톤(Chiton)이라고 하는 셔츠와 같은 속옷을 입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채권자가 그 사람으로부터 치톤을 빼앗아 오는 것은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태인은 담요와 같은 겉옷(Himaton)을 또한 입는데, 이는 낮에는 입고 다닐 뿐이지만 밤에는 이불과 같이 덮고 자는 것입니다. 이 겉옷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빚을 지고 있을 찌라도 채권자가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신 24:12-13). 그런데 예수님은 비록 그가 합법적으로 빼앗아 갈 권리를 갖고 있지 않는 겉옷까지도 그에게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통상 우리는 권리를 주장하기는 좋아하지만 책임을 지기는 싫어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책임에 대하여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마 5:41-42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한 가지 굴욕적인 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군인은 유태인 누구에게나 그의 배낭을 강제로 오리를 메고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군인은 이를 시키고 싶으면 유태인에 접근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창으로 어깨를 툭툭 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유태인은 좋건 싫건 로마군인의 배낭을 오리까지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의무를 이행하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고, 그 의무를 넘어서 그 이상을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것만 하는 사람, 즉 자기에게 꼭 해야 할 일 외는 조금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 조금 더 부탁하면 기분나빠하고 언짢아하는 것이 통례이고 보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말씀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의무 이상의 것을 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신학자인 쟈크 엘룰(J.Ellul)의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본래의 복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뒤틀려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책 속에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는 것을 멈추고, 사랑 안에서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구세주의 충성된 종이 되기를 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기독교는 도덕 종교로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한 것입니다.


위의 쟈크 엘룰의 말처럼 앞에서 말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어찌 보면 세상의 가치관과는 뒤틀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 세상의 법은 이와는 정 반대로 최소한의 인간에 주어져 있는 의무를 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는 최대한 누려라는 가치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입니다.


4. 결론


(1) 힘의 논리와 칼의 노래


성경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기사가 나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로 인한 결과입니다.그런데 라멕은 그의 아내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 벌을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리로다” 하였더라. 칼의 노래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를 합니다. 소피스트들은 정의를 “강자의 권리” 또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진화론도 약육강식을 통하여 적자생존의 원리를 중요시 여깁니다.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원리입니다.


(2) 우리는?


칸트의 미와 숭고함, 그리고 벤담과 밀의 행복론을 굳이 어렵게 접근해 본 이유가 무엇일까? 참된 행복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어떻게 더해지는 것일까?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삶을 보면서, 그리고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힘의 논리나 칼의 노래가 아닌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로 뒤집혀진 가치관을 가질 수 없을까? 야스퍼스는 진정한 실존과 자유는 심미적이거나 에로스적인 것도 아니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도덕적 실존으로도 부족하며, 종교적 실존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존재의 진정한 실존은 초월자와의 소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종교적 가치가 전도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경향도 있기 때문에, 저는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쟈크 엘룰이 말하는 것처럼 뒤틀려진 기독교는 아닌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에도 칼의 노래와 힘의 논리가 앞선다면 안 되겠지요. 텔레비전에 “비정상회의”에서 보듯이 무엇이 정상이며 무엇이 비정상인지 구별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가치의 전도된 시대 속에서 진정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행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결론을 말씀드리긴 너무 어렵겠지만, 최종적으로 우리 인간은 “응답하는 존재”라고 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한 표현을 독일의 하이네만(F.Heinemann)처럼 “나는 응답한다. 고로 존재한다.”(Respondeo ergo sum)라고 바꿔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참된 우리의 가치관은 물론 행복을 찾으셔야 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응답에는 우선 우리를 초월해 있는 절대자에 대한 나의 응답이 먼저이며, 그리고 나아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내 이웃과의 응답이 또한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응답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물론 존재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음주 월요일 저녁 모 단체에서 할 특강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