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철의 치유사역에 대한 성찰 II, III, IV / 김영한

by dschoiword posted Jul 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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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철의 치유사역에 대한 성찰 II / 김영한


손기철의 성령론은 온건하다


크리스찬투데이 (       )

                    

▲김영한(샬롬나비)

필자는 앞서 서술한 교계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존중하면서 손기철의 치유 사역에 관하여 두 가지 면, 긍정적 측면과 우려되는 측면에서 조심스레 평가하고자 한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발표한 장신대 교수 현요한의 연구는 균형 잡혔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주 앤아버 반석교회 담임목사 정이철은 그의 저서 『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모든 은사운동을 모조리 정죄하였다(정이철, 『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한국교회 속의 뒤틀린 성령운동, 서울: 새물결 플러스, 2012). 이러한 태도는 은사자들을 선도(善導)하기보다는 더욱더 공교회에서 소격시켜 버릴 부작용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신대 교수 황덕형은 성령운동을 인정하는 성결교 대학의 교수로서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모든 은사운동을 이단시하는 무분별한 태도를 지양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날 일어나는 은사 사역이 공교회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보다 객관적인 태도로써 손기철의 사역운동에 관하여 긍정적 측면과 우려되는 측면을 지적하고자 한다.


(1) 특징


손기철이 치유사역자가 되기까지의 내력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 간간이 나타나지만, 『고맙습니다 성령님』 이라는 책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피력되고 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초판 98. 쇄(서울: 규장, 2012). 간단히 살펴 보면 그는 건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나와서 미국 메릴랜드대학과 조지아대학에서 공부했다. 조지아대학 시절에 그곳 한인교회에서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거기서 성령 체험을 하고 방언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모교에 돌아와 가르치면서 온누리교회(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창조과학회를 알게 되어 열심히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9년에 교회의 임명으로 온누리교회 내적치유사역팀에 들어가 봉사하다가, 그만 자기가 내적으로 치유를 받고 성령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지도목사의 명으로 자신이 안수하며 치유기도를 시작하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손기철 장로는 2004년에 온누리교회 담임목사(하용조)의 허락을 받아 교회 안에서 월요치유집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차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치유 사역과 교수직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이 정말 치유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2005년에 안식년을 내어 미국에 가서 여러 은사 집회와 치유 집회를 다니던 중, 자기를 알지 못하던 어떤 치유 사역자에게서 부르심을 확인받고 돌아와 다시 치유집회를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온누리교회를 떠나 독립하여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선한목자교회(담임 유기성 목사)에서 장소를 빌려 월요치유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그가 이끄는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는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손기철, 『기대합니다 성령님』, 초판 11쇄 (서울: 규장, 2011), 16쪽 이하.).


<1> 인격적 성령관


손기철은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가운데 한 분이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님을 인격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기묘한 능력이나 에너지로 취급한다든지, 하나님을 돕는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181.).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세계 창조에 협력하셨으며, 진리의 영이시고, 보혜사이시며, 전능하신 분이고, 사랑이시라고도 한다(위의 책, 182-183.). 


그는 성령의 내주, 그리고 구원(칭의 혹은 중생)과 구별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3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내주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해서 우리를 온전히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다(위의 책, 184.). 온 우주에 편재하신 성령(with us)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안에 거하신다(in us).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양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단순한 내주가 아니라 충만히 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즉 기름부으심은 ‘함께 거하심(with us)’과 ‘안에 거하심(in us)’과는 다르다. 그것은 ‘위로부터 임하심(upon us)'에 달려 있다(위의 책, 327-328.). 


이러한 그의 성령 이해는 성령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세 위격 중 한 분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성령 이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현장의 치유사역자로서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교리적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체험과 이에 상응하는 성경구절로써 설명하고 있다. 이 항목에 대하여는 오늘날 공교회도 교파나 신학적 관점에 따라서 이해가 조금씩 다르니, 이에 대하여는 일단 그의 견해가 온건하다는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2>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온건한 이해


손기철에 의하면 구원은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령세례는 구원 뒤에 주어질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구원과 동시에 혹은 먼저 받을 수도 있다. 성령세례는 성령충만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작,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위의 책, 185.). 성령세례는 하나님 영광의 임재, 안식, 내적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성령세례는 옵션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97.).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성령세례는 성령이 강력하게 임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심을 뜻하는 반면,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생긴 은사와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삶을 말한다고 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14.).


그는 성령세례와 기름부으심을 구분한다. 성령의 임재는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인격을 가리키는 반면에, 기름부으심은 그분의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17.). 영광의 임재 가운데 안식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혼과 육을 다스리는 것(성령의 내적 열매)이요, 기름부으심은 우리의 혼과 육을 통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는 것(성령의 외적 열매인 은사)이라고 한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222.). 기름부으심은 사역을 위한 것이요, 은사, 즉 외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34-335. 손기철은 기름부으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별도로 한 권의 책에 썼다. 손기철, 『기름부으심』 초판 37쇄, 서울: 규장, 2011). 


구원과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는 사도행전에 따라서 “구원 뒤에 받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구원과 동시에 혹은 먼저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구원과 성령세례를 분리시키지 않고 구원과 동시에 먼저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개혁신학의 성령론과 마찰을 피하고 있다. 개혁주의 성령론의 핵심은 중생과 회심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능력세례를 주장하는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서는 개혁주의 성령론을 지니고 있다(D. M. Lloyd Jones, Joy Unspeakable, Kingsway Pubication, 2000, 정원태 역, 『성령세례』, CLC, 21.). 여기서 손기철은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으로 들어가는 시작으로 보는 점에서 성령세례의 이중구조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순절 신학처럼 회심과 믿음의 단계와 성령세례와 은사 체험의 이중구조를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12), 151.). 그리하여 그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신앙적 발전의 두 단계로 보아서 성령충만으로 가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개혁신학의 관점에서는 “성령 받음”이나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신약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문제시할 수는 없다. 단지 “성령 받음”이나 “성령세례”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성령 받음”이란 신앙고백, 복음을 믿음, 의롭다 함을 받음, 거듭남과 함께 일어난다(현요한, 『성령, 그 다양한 얼굴』, 서울: 장로회신학교출판부, 2009, 456.). “성령 받음”이나 “성령세례”는 하나님 말씀을 받는 것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바울이 제3차 선교여행 시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고 물은 것은 신앙고백이나 칭의를 얻음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은사와 표적들은 교회를 섬기는 능력을 받음과 관련된 것이다(현요한, 『성령, 그 다양한 얼굴』, 460.).


개혁신학의 관점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는 성령을 받은 자요 중생한 자로 본다. “성령을 받는 것과 믿음의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도록 그분을 영접하는 일과 성령의 내주하시는 것은 실제로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 속에서 살아 계시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임재와 성령의 동거하심이 각각 별개의 내용이 아니다(롬 8:8-9).”(김재성, 『개혁주의 성령론』,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12), 87.). 성령충만이란 반드시 은사와 표적과 능력만을 가리키지 않고 거룩한 생활, 성화의 원동력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오순절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제2의 경험”이나 “제2의 세례”로 간주하기보다는 말씀의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손기철의 성령론은 하나님 말씀을 받음보다는 은사와 표적의 나타남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온건하다고 볼 수 있다. 


<3> 방언보다 삶의 열매 강조


손기철은 오순절 교파와는 달리,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적으로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58이하;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8, 215.). 그러나 그는 방언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방언의 유익을 강조한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9이하.).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방언이 성령세례의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령세례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잠재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61.). 그러나 그는 방언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라고 강조한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규장, 2007, 215.). 


손기철은 『고맙습니다. 성령님』이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적 가치관, 관습과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누가 뭐라도 해도 당신의 모든 판단과 태도를 하나님의 법에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모든 견고한 생각과 감정들을 버려야 합니다.”(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44.). 삶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가 장로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니 개혁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견해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구분하며, 방언이 반드시 표적으로 따라온다고 보는 소위 고전적 오순절 교파의 견해와는 다르다. 1960년대 이후 오순절운동이 기성 교회들 안으로 흘러들어간 소위 신오순절운동의 경향과도 좀 다르다. 또한 1980년대에 이르러 오순절운동에 비판적이던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성령세례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소위 “제3의 물결운동”의 주장과도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은 대체로 은사에 대하여 열려 있는 개혁신앙의 신자들에게도 수용될 수 있다. 


<4> 자기 관리 철저: 자신의 신격화 거부 


은사치유자들은 대규모 치유집회를 정기적으로 인도하고, 국내외적으로 집회를 다니면서 치유받았다는 사람들의 뜨거운 간증을 접하고, 자신을 따르는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만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현재로는 손기철은, 철저히 자신이 치유자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치유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나는 매일의 삶이 정결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삶 그 자체가 치유사역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48.). “나는 매일 기도하며 오직 주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이 능력 주시지 않으면 저 죽습니다. 저를 부끄럽지 않게 해주세요. 신유사역자로 주께서 부르셨잖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저만 망신당하는 거 아니예요. 주님도 망신당하시는 거예요’.”(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49.).


그는 자신은 “빈 깡통”(손기철, 『기름부으심』, 87.)이요, 치유와 기름부으심의 “통로”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은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사의 통로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일 뿐입니다.” (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41, 190.). 왕의 기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도 왕권을 가진 자로 나서게 되고, 섬기는 왕의 모습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과거에 박태선이나 양도천이나 문선명이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사역을 하다가 교만해져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단에 빠진 것과 같은 전례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이들 이단 교주들도 초창기에는 그 정체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기성교회 목회자들이 하지 못하는 기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거기에 열광되었다. 남대문교회 장로 출신 박태선은 당시 6.25 전쟁 이후 부산 피난 시에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전쟁 이후 서울로 되돌아와 한강 백사장에서 기적을 행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열광해서 추종하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을 “똥강아지”보다 못한 자라고 겸손하였다. 그러나 차츰 그는 교만해지고 변해갔던 것이다. 그는 “감람나무”가 되고, “동방의 의인”이 되더니 나중에는 “재림주”, “천부 하나님”으로 등극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기적을 행했던 영의 정체가 점차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유사역도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정도 지나가서야 비로소 그 영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습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본인 자신이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자기 부인(self-denial)의 성찰과 자기 죽이기(self-mortification)의 각고(刻苦)의 노력 없이는, 그 은사운동이 10년 이상 유지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5> 그의 치유 사역은 성령의 현재적 사역 이해와 복음 전도에 실제적 효과


총신대 교수 김지찬은 오늘날 정통주의자들의 영적 게으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상당수의 소위 ‘정통주의자’들은 말 뿐이지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열렬히 갈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위 정통주의자들은 예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 수천 년 전에 히브리인들과 초대교회에 주었던 성경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왜 계시가 되는지를 생동감 있게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일반 교인들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크리스천투데이, ‘왕의기도’ 연구자 총신대 김지찬 교수 인터뷰, “손기철 장로, 은사중지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입력 : 2011.08.25. 07:00). 

이런 점에서 손기철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하나님 말씀과 성령 임재와 사역의 현재화를 경험하게 하고 그에 대한 갈망을 회복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송영옥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손 장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머리로만 아닌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강조”하는 것( 송영옥, [기고] “그날, 손기철 장로의 집회 이야기, 총신대 김지찬 교수 인터뷰를 보고”, 크리스천투데이, 입력 : 2011.09.15 06:58 )에 평신도로서 목회자나 신학자 못지 않게 공헌하고 있다. 초자연적 현상을 도외시하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예수의 치유사역이란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주장하는 것(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대한기독교서회, 2003, 197-202.)처럼 단지 신화적 치장에 불과한 것으로 무력화되는 상황 속에서 손기철의 치유사역은 복음전도에 하나의 실제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맺음말


그러나 기적만을 위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전도하는 일은 하나의 영광의 신학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보다는 초자연적 능력(복덕 방망이)을 행사하는 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의 신학에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아들의 고난 속에서 철저히 부재하시는 하나님)과는 다른 신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큰믿음교회에서 신문광고까지 하면서 신유기적을 광고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치유은사자는 치유은사를 직업화해서는 안 된다. 치유를 미끼로 돈을 요구한다거나 세상적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거룩한 치유의 역사를 은사매매로 바꾸는 것이다. 은사자는 성령이 사용하시는 거룩한 질그룻이다. 은사자는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막대기가 스스로 성령인 체하거나 신적 존재인 체한다면 그 순간 그는 마귀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항상 나를 쳐 복종시킴은 복음을 전한 후에 내가 버림을 당할 줄을 두려워함”이라고 하였다. 손 장로는 그가 받은 첫 사랑과 은혜의 감격을 잊어서는 안 되며 치유사역의 성공과 양적 팽창에 몰두하다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손기철의 치유사역에 대한 고찰 III (김영한)

그의 치유(治癒)보편주의는 비성경적이다 


크리스찬투데이 (2014.07.25.)


▲김영한(샬롬나비 회장/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손 장로를 비롯한 은사주의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들이 받은 몇 가지 은사를 절대화하려는 경향성이다. 성령론에 있어서는 크게 이렇다 할 흠을 잡을 수 없는 손 장로는, 그의 치유사역론에 있어서는 성경이 말하는 한도를 넘어서서 말하려는 열광주의적 면이 드러나면서 우려스럽게 보인다.


손기철의 치유사역론에 있어서 우려스러운 것은, 모든 질병이 치유된다는 치유보편주의(healing universalism)다. 이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치유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사역론에 있어서 그는 모든 질병 치유론을 말함으로써,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해 주신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치유(治癒)받기 원하는 당사자들에게는 격려와 소망을 주는 메시지임에는 틀림없다. 이 치유보편주의는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이고 그럴 듯하나, 이것은 치유사역을 위한 하나의 슬로건이지 성경의 뒷받침을 받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질병을 치유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과,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 모든 질병 치유론: 불치유(不治愈)에 대한 설명 부재


손기철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은사나 기적이 종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은사중지론에 반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치유하시며 모든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주장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33, 237.). 그는 모든 질병 치유의 근거가 예수님의 대속에 있다고 본다. 그는 특히 이사야 53장 5절과 마태복음 8장 16-17절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질병을 짊어지셨음을 강조한다[손기철, 『치유기도』 초판 18쇄 (서울: 규장, 2010) 23-24.]. 그는 신체 질병 치유가 영혼의 구원과 같은 정도로 보지는 않지만, 신체 질병 치유가 믿는 자의 특권이라고 본다. 그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치유받지 못하는 이는 의심과 불신앙으로 예수님 앞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 뿐이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238.). 존 윔버의 치유사역에서도 진정하게 치유받은 자들이 25% 정도에 불과함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신경성 질병이거나 소화기 계통의 병들이 많았다고 한다. 손기철의 치유사역에서 모든 자가 다 치유받지 못할 뿐 아니라, 상당수가 간절히 치유받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치유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의 모든 질병 치유론은 이러한 치유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치유받지 못한 현상에 대해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가 주장하는 모든 질병치유론이 그의 치유사역에는 도움이 되는 교리일지는 모르나 이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황성철,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평”, 총회신학부 편, 『바른 영성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조망』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부, 2011), 331 이하]. 하나님께서는 모든 질병을 낫게 하실 수 있으나, 모든 질병의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근거를 사도 바울의 육신의 가시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손기철은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9)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에서 고침을 받지 못한 것은 바울의 불신앙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바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a).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고자” 하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b).


고치지 못한 질병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에서도 모든 병자들이 치유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그의 겸허한 은폐성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이 고침을 받도록 하는 것은 영광과 번영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비록 치유사역자들을 사용하시나 모든 질병을 낫도록 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의 영광을 은폐하시는 십자가의 모습 속에 계시는 것이다.


2. 손기철의 하나님 나라론은 미래적 실현을 거부하는 현재적 심령왕국론


손기철 치유 신학의 기초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 나라 신학이다. 이는 예수의 선포,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에 근거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이요,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나타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17.). 그런데 손기철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죽은 후에 영혼이 찾아가는 저 세상적인 실체로 보거나, 미래에 있을 주님의 재림에 의해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에도 찾아오시며, 그분이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오심과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이미” 성취된 것이요,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라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손기철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을 “킹덤 멘털리티(kingdom mentality)”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땅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관점이 아니라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애쓰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는 관점(의인이 주의 뜻을 이루려는 관점)”이라고 한다. 그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충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117.). 이는 영국의 신약학자 다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며, 미래적 종말론을 도외시하는 일면적인 주장이다.


이 면에 있어서 손기철은 존 윔버와 피터 와그너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치유사역 초창기 사역에서 존 윔버의 치유사역 경험담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존 윔버(John Wimber) 목사님의 책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풀러신학교에서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목사님과 함께 치유과목을 처음으로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분의 책 『능력치유』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유하기를 사모하여 성도들에게 기도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한 번, 두 번 기도를 반복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거의 10개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매가 정말 치유된 것입니다. 그 후 존 윔버 목사님은 세계적인 성령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이 대목을 스무 번을 읽었을 것입니다.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으며 위로를 받았습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37-8.).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성경적 하나님 나라는 손기철이 강조하는 현재적 나라라기보다는 종말론적 미래적 하나님 나라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나의 심령 속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미래적 종말론의 선수금일 뿐이다. 이러한 미래적 하나님 왕국이 손기철의 왕의 기도론에서는 결여되어 있다. 손기철의 하나님 나라론에는 이미(already) 실현된 하나님 나라만 언급되고 있으며,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not yet)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간과되고 있다.


3. 지상에서 구현될 미래적 하나님 나라 거부하고 현재적 하나님 나라만 강조


손기철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승리하기 원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87, 304 이하.).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초청하고,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며,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 우리가 밟은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면,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126.).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입술의 선포로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한다(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87.). 먼저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왕의 선포는 “조계사 땅밟기”를 유발시키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기독교인의 무례함으로 비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입술로 선포하면 비로소 임하는 것일까? 그가 말하는 왕의 기도의 방식으로 선포하면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가? 객관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입술의 선포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론은, 그가 영향을 받은 신사도운동의 피터 와그너의 현재적 하나님 왕국론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에 반하여 미국 풀러신대의 신약학자 조지 래드(George Ladd)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더불어 미래성도 강조하고 있다. 개혁신학의 전통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더불어 미래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4. 공동체적 사회적 치유 간과


손기철은 하나님 나라를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그 무엇보다도 병자들의 치유로 드러난다고 본다.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손기철은 병자들의 치유와 귀신을 추방하는 일 등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표징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질병 치유와 귀신 추방에 한정하여 좁게 이해하고 있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지 신체적인 영적 치유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과 질병 치유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가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나라라는 것은 한 개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의 공동체와 사회로 구성된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그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나라가 되어야 마땅하다. 가난한 자들과 소외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사회적 부조리한 구조에서 해방받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불의한 구조가 새롭게 변혁되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는 언급하지 않는다.


맺음말


치유보편주의는 모든 질병 치유론을 앞세워 치유사역자의 전능사역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물론 치유사역자는 하나님이 낫게 해주시며 자신은 도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유는 사역자를 질병 치유의 통로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사역자가 모든 질병을 가진 환자들 앞에서는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의 치유기계로 부각될 수 있다. 그리고 질병 치유의 결과는 하나님 자신보다는 결국 치유사역자의 자기 영광으로 돌아갈 위험성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질병 치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고치는 분이기 때문에, 치유기도를 받는 자가 나음을 받지 못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과 기도의 부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경우 치유사역자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만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하나님은 지나쳐 버린다. 이는 그가 비록 하나님이 모든 자를 고치시는 분이시기는 하나, 어떤 경우에는 고치지 않으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역자 자신이 자기가 고칠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려는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손기철 치유사역에 대한 고찰 (IV)/ 김영한

번영신학에 편승? 사도 임명은 신사도 운동을 추종? 


크리스찬투데이, 2014.7.4.

                  

▲김영한(샬롬나비 회장/기독교학술원장/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머리말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대부분의 성령사역은, 번영과 영광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특징지어진다. 표적과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복음 사역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은사사역자들의 치유사역에서 말씀의 선포와 회개가 등한시되고, 이적과 기사가 주목표로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고난과 자기 헌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점차 변두리로 물러가고, 만병 치유의 하나님만을 부각함으로써 하나님을 질병 치유와 사업 성공의 열쇠로서만 표상하는 점이다. 여기에 물질이 강조되면서, 사역이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장막이 아닌 인간의 장막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다.


1. 왕의 기도론: 입술로 선포되는 하늘나라는 번영의 신학에 편승?


손기철은 『왕의 기도』라는 책에서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 요건, 구체적인 방법, 예문까지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도에는 세 종류, 즉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가 있는데 ‘왕의 기도’는 바로 이 세 번째 기도라고 한다(손기철, 『왕의 기도』, 23-24.). ‘왕의 기도’는 “왕이신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이다(손기철, 『왕의 기도』, 26.). 왕의 기도가 꾸짖고 명령하는 것이라면, 왕의 선포라고 해야지 왜 왕의 기도라고 하는가(현요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20.)? 그가 말하는 “왕의 기도”, 즉 선포는 질병이나 질병을 가져오는 악령이나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 자녀의 권세로 명령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찾아온 모든 병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 속에는 질병 치유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는데 하나님 나라에는 질병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선포해도 결국은 낫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병자를 지금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믿고, 담대하게 선포하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선포를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고, 안 일어나는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기도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쯧쯔파(chutzpah) 믿음을 가져라”(손기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개정판, 314. chutzpah는 Yiddish 말로, 행동에 극단적인 확신을 가진 것을 묘사한다고 한다). 쯧쯔파란 유대인의 민족성인 대담함·뻔뻔함을 뜻한다.


이러한 왕의 기도는 선포하여 낫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그 책임을 미룰 뿐 아니라, 복음 이해를 오로지 병 치유를 통한 이 세상에서의 무병의 삶이라는 기복(祈福)에 두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손 장로는 낫지 않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불간섭에 대한 십자가 신앙의 의미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질병의 치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 속에 이루어지는 신령한 나라다. 질병 치유는 하나님 나라 임재의 징표일 뿐이다. 그런데 손기철은 모든 질병 치유를 선언함으로써, 와그너가 말하는 하나님 통치에 기반한 번영의 신학에 편승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왕의 기도는 와그너의 통치신학에 영향을 받고 있다. 와그너의 통치신학은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kingdom now)에 기초해 있다. 와그너는 그의 저서 곳곳마다 “제2의 사도시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와그너는 『신사도 교회로의 변화』(Changing Church)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이 2001년이 바로 내가 앞에서 제2의 사도시대가 개막된 시점으로 지목한 해다. 나는 신사도적 개혁과 ‘제2의 사도시대’라는 표현을 이 책 전체에서 자주 사용할 것이다. 제2의 사도시대는 과정이 아니라 역사적 시기다. 하나님이 신사도적 개혁을 통해 이루어 오신 일의 결과로 우리는 제2의 사도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다.”(Peter Wagner, Changing Church, California: Regal Books, 2004, 김영우 옮김,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세키나, 2006, 13.). 와그너는 그 근거가 지구촌 곳곳에서 신사도교회가 전통교회를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본다. 와그너는 표적과 기적에 의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본다.


와그너 역시 다가오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제2의 사도시대”라는 말은 위험스러운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현재의 제2의 사도시대는 언제든지 신약의 제1의 사도시대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과 더불어 와그너는 정경적 계시의 차원을 넘어서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2. 직통계시의 위험성?


손기철은 치유 사역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고전 12:8)라고 하는 것을 활용한다. 그의 집회에서 “오늘 하나님께서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자매님을 고치십니다. 이쪽 오른쪽 좌석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데요, 앞으로 나오세요”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누군가 앞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환자의 상태에 관하여 초자연적으로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한다. 이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환자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를 알려주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 순간에 오직 그만이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는 자로 나타난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체험담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기도 받으러 나오는데 심중에 “저 사람 폐에 문제가 있다”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그는 그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께서 치유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시는 인도하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지찬이나 현요한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 자칫 직통계시를 주장할 위험성이 있다(김지찬, “손기철 장로의 신비주의 은사(치유) 집회, 어떻게 볼 것인가?” 302-308; 현요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과 신학에 관하여,” 22.). 그러한 음성들이 과연 정말 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에 관하여 손기철 자신도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음성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올 수도 있지만, 사탄의 영이나, 사람의 영으로부터도 올 수 있기 때문이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0-91.). 다행히 손기철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음성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88.). “성령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 것이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손기철, 『고맙습니다 성령님』, 91.). 영적 사역을 하는 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어서, 자신에게 들려온 내적 음성과 생각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상응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내적 지시에 의한 빌립의 에티오피아 내시 전도(행 8: 29-40), 고넬료의 영적 환상 체험, 고넬료에 관한 베드로의 환상 체험과 고넬료 가정 방문 전도(행 10장), 성령이 바울을 유럽으로 보내심(행 16:6-10) 등에 근거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복음 전도와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이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성은 계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내적 조명이라고 불러야 하며, 이러한 내적 조명은 항상 계시된 말씀에 비추어 참과 거짓이 음미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는 사실은, 사역자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역자가 성령을 임의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단지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쓰러뜨림이 은혜의 수단인가?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가?


손 장로의 치유집회에 가면 참가자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손을 이마에 대거나 손짓만 하여도 사람들이 뒤로 넘어진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토론토 블레싱, 펜사콜라 부흥 등 신사도운동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뒤로 넘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동료 신학자에 의하면, “호주에서 이분의 집회에 참석해 보았는데,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가서 이분이 이마에 손을 대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쓰러지니까 본인도 같이 쓰러졌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목회자는 4-5백명의 출석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부러워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토론토 블레싱에 참석하여 쓰러짐을 경험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본 교회에 돌아와서, 새벽기도 시에 교회 장로와 제직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쓰러뜨리는 안수집회를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교회가 부흥이 된 것이 아니라 은사파와 비은사파로 교회가 나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쓰러뜨림이 은혜받는 것과 연관된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다. 다니엘의 경우 천사가 보여준 환상 앞에 압도되어 혼절한 것은 있으며, 18세기 웨슬리의 부흥집회에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청중들 가운데 졸도하여 쓰러지는 예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쓰러짐은 성령의 역사에 따른 수동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손 장로가 의도적으로 쓰러뜨려 은혜를 받게 한다는 것은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니 힌(Benny Hinn)이 미국 신사도운동에서 장풍(掌風)으로 주로 쓰러뜨리기를 하고 있는데(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7280), 손 장로는 베니 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닌가? 베니 힌의 집회를 동영상(정동수 목사, 오순절 은사운동 바로 알기: (사랑침례교회) 사랑침례교회, Charity Baptist Church 제공한 youtube 동영상. 게시 시간: 2012. 06. 28.)으로 보니, “불”이라고 하면서 장풍으로 강대상에 나온 모든 자들을 쓰러뜨렸다. 강대상에 올라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떨면서 쓰러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웃음이 폭발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앉은 자리에서 집단적으로 쓰러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코너를 향하여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불” 하고 장풍(掌風)을 보내니, 수십 명의 신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그 앉은 자리에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쓰러뜨리고, 아우성과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이것을 복음 전파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죄의 회심과 새로운 삶의 결단이 없는 설교와 집회는 이방 종교의 모임과 다를 바 없다. 기독교들의 모임은 이방인들의 모임과 구분이 되어야 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2-33).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회개의 복음 전파는 없고 신기한 장풍으로 인한 쓰러뜨리기가 지속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보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자본주의 설교가들이 외치는 영광의 신학과 번영의 신학이지 바울과 루터가 증거한 십자가의 신학이 아니며 고난과 헌신의 신학은 아니다.


베니 힌(Benny Hinn)은 최근에는 재정과 조직원의 헤로인 마약과 관련된 스캔들 때문에 공적 신뢰성이 추락한 인물로 평가된 인물이다. 1998년 베니 힌 미니스트리(Benny Hinn Ministry)의 내부 사역자 두 명이 헤로인 과다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그는 조직의 쇄신에 관한 발언을 한 직후 몇 명의 사역자들을 해고했다. 그들 중 전 경찰관 마리오 리시알델로라는, 그의 사역 내부 조사 담당이 포함되었다. 리시알델로는 베니 힌 미니스트리의 수백 개 계좌 정보와 헤로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자료들을 입수하게 되었는데, 베니 힌은 그를 고소하였다. 그때 리시알델로는 경호장으로 있었으며, 베니 힌 미니스티리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서류들을 돌려줄 것과 밀봉할 것(공개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것들이 공개되면 그의 사역은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베니 힌이 이 사건에 대한 공탁을 하기 전날, 리시알델로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때 베니 힌은 리시알델로의 부인과 소송 서류를 공개하지 않는 것 등에 관한 법정 밖 합의로 이 사건을 해결하였다(발췌 : http://blog.daum.net/song3294221/10444968).


4. 사도를 임명하는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에서는 손 장로 자신이 인정하는 자들을 사도로 임명한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신사도운동의 창시자의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교회의 조직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는 사도 네트워크(Apostolic network) 안에서 각 사도들이 카리스마를 배양한다면 더 많은 사도들을 배출시킬 수 있다고 하는, 신사도운동의 정책( 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79.)에 따른 것이다. 와그너는 자신이 인정하는 초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사도로 임명하고, 자신은 사도회장으로 행사하고 있다(Peter Wagner, 『21세기 교회성장의 지각 변동』, 136.). 이는 명백하게 성경에 위배된 것이다.


신약교회의 사도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3년간 공적 사역에 있어서 그분들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직접 받은 자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소아시아에 설립된 교회(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로마, 데살로니가 등)의 신자들에게 서신을 쓰고, 이들의 증언에 따라서 복음서가 기록되었다. 이들의 서신들과 증언에 근거하여 기록된 복음서들은, 신약성경이라는 정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도라고 불린다. 이 사도직은 일회적이다. 오늘날은 교회가 설립되고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도직이 필요없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지속적이나, 사도나 예언자라는 직책은 중단된 것이다. 오늘날 사도직을 인정한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며, 성경을 다시 쓰겠다는 주장까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자기가 사도들을 임명하고 이들로 구성된 “국제사도연맹”을 창설하고 자신은 회장이라고 일컫는데,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가 만든 사도직이란 스스로 자신이 인위적으로 권위를 창출한 것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손 장로가 자기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에서 임의로 사도를 임명한다면, 그것은 신사도교회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그의 사역의 미래가 어디로 갈 것인지 걱정스러운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맺음말


필자는 이 칼럼에서 손기철의 치유사역이 지니는 밝은 측면과 우려스려운 측면을 같이 다루었다. 모든 사역자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역에서도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하고, 부정적 측면만을 들추어 정죄하기보다는 긍정적 측면을 같이 보면서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 요청된다. 손기철의 치유사역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하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하여, 성령의 현재적 사역과 복음 사역에 실제적 효과를 가져다 주는 밝은 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치유사역은 치유보편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세상의 번영과 성공과 치유 만능과 더불어 치유자 신격화 내지 교주화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손기철 장로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신유사역에 관하여 일부 단체가 보이는 것처럼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보다는, 이들의 사역을 잘 지켜보면서 말씀과 교회의 신앙경험에 근거하여 이들의 사역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목회적 신학적 지도를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