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와 한국은 형제국인가?

by dschoiword posted Sep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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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터키와 대한민국은 형제국가인가?

 Samuel Lee

이 이야기는 이십 수년 전, 미국 유학하여 대학원 다닐 때, 역사를 전공한 터키 친구에게서 감명 깊게 들었던, 고구려와 돌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 이야기를 인터넷상에 올려서 재탕, 삼탕, 사탕 하여 찬·반의 뜨거운 격론을 이어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리의 고대사 이야기를 외국 친구에게 자세히 들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듬어 다시 올립니다.

시작하는 말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터키’ 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터키가 6·25 때 미국, 영국에 이어 1만 4936명이라는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721명 전사에 2,147명이 부상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또 전사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릅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코리아(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단군의 건국기원을 함께한 돌궐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突厥)’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겁니다. 220년에 수립된 ‘테오만 야브구’ (Teoman Yabgu = 흉노 = 匈奴) 왕국은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흉노(匈奴)라 불리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지요.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족으로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돌궐인이 고구려의 기층(基層)민중에 속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년), 돌궐은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은 초기엔 당(唐),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습니다. 또 귀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일부는 당에 포로로 잡혀갔지요.

나머지 고구려 유민은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에 동돌궐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에 「돌궐 제2 제국」을 수립할 때, 바로 여기에 참여합니다. 참여한 유민의 숫자가 전체 「돌궐 제2 제국」 인구의 절반인 20만 명이 넘었다니 돌궐 제2 제국은 고구려의 후예라 하여도 될 판이지요.

돌궐이 고구려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우선, 돌궐의 왕은 선우(單于) 또는 가한(可汗) 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에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이 있었습니다. 「돌궐 제2 제국」의 선우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고구려 유민을 우대하여,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며 유민의 수장인 막리지 고문간(高文簡)이라는 사람을 고려왕(高麗王)으로 봉했답니다 (참고: 구당서 권 144 돌궐전, 상). 

즉, 좌현왕과 우현왕, 둘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는데,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왕을 한 명 더 늘려 고구려 유민을 앉히고 ‘고려왕’이라 칭했다는 겁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유민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에 임명합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제사장을 ‘단군’이라 호칭한 전통을 인정하여 돌궐말로 ‘탕구르’ 또는 ‘탱글리’라고 했다고 하니 이들은 우리와 건국기원을 같이한 셈이지요.

터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 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상 전래의 ‘탕구르’ 신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과 풍습은 아직도 지속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역사적 증거자료

돌궐은 7세기에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 언어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구려와 돌궐의 자세한 관련 내용이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비문(碑文)들이 몽골 오르혼 강(江),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江) 상류와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답니다. 

특히 오르혼 강(江) 비문은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Vilhelm Thomsen)이 현대 터키 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과 고구려와 관계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종식했답니다. 그 이유로 터키의 역사책 가운데 고대사 부분을 보면 고구려와 흉노 그리고 돌궐족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고요. 

자신들의 조상이 고구려, 흉노, 돌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 비문(碑文)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많은 터키인은 자신들의 조상이 현재의 터키에서 수천 리 떨어진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흥망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남하(南下)하여 서방으로 이동합니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드의 후계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이었지요.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튀르크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셀주크튀르크 제국은 칭기스칸의 몽골에 패하여 몽골의 지배를 받습니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투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 투르크(1299~1922)’ 제국을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무려 7세기를 이어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민혁명으로 멸망하지요.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가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지요.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소수민족들이 모두 독립하는 바람에 영토를 잃고 지금의 터키만 남게 된 겁니다.

인식의 차이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 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처럼 터키가 한때는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고, 고구려멸망 후에는 우리가 「돌궐 제2 제국」의 기층민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거지요.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요?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역사 교과서의 차이입니다. 우리나라의 중, 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터키는 다릅니다. 7세기를 이어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은 한국을 사랑합니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었답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는군요.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답니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고 합니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습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던 거지요. 

터키는 과거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으며, 「돌궐 제2 제국」을 같이 한 우리 한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6·25때 북한이 남침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군대(1만 4936명, 전사 721명, 부상 2147명)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지요.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답니다 (참고: 조남준, 터키(돌궐)와 한국, 월간조선 2006-07-24).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흔적 찾기

터키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고, 우리와 같은 알타이어계에 속하여 문장구조순서, 모음조화, 어미활용 등에 있어서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 정서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고요. 터키인은 민족적 우월주의에, 감정적으로 다혈질이면서도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성질 급한 것까지 한국인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골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고요. 한민족은 유전적으로 열성입니다. 혼혈아가 태어나면 한민족의 특성보다는 상대민족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요. 맨눈으로 터키인에게서 한민족의 특성은 찾을 수 없을지는 모르나 유전자 DNA 검사를 한다면 형제로 판명이 나겠지요. 아무튼, 터키의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가 있는 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까지, 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지요.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에는 ‘배달국’과 ‘고조선’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인 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 된 민족이지요.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 시대 이후 한국은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하였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 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안 국가 중 하나이지요. 북방계 몽골리안 국가는 몽골,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북미 인디언, 헝가리입니다. 이중 헝가리는 터키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안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이지요. 

터키의 중학교 2학년 사회 교과서에도 "코리아와 우리 민족은 먼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형제로 함께 살았다."라고 나옵니다. 물론, 터키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고학력의 터키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흐르는 대단한 형제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터키와 북한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 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요?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겁니다. 

터키가 중앙아시아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에 밀려 서쪽으로 갔으니,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같은 영토분쟁과 종교분쟁이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과거, 돌궐을 용병으로 불러드려 멸망을 자초한 아르메니아인인 오스만 기독교인들이 터키의 영토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고토를 이스라엘처럼 탐하다 투르크 이슬람교도인 터키인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오스만 튀르크(1299~1922)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투르크의 쇠약해진 국력을 틈타 고토회복의 기독교 민족주의 투쟁을 벌이다 터키와 분쟁이 일어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는 유럽으로 남진하려 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은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 되고 ‘오스만 튀르크’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지요. 이와 맞물려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니아인들이라 칭하며 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 겁니다. 

1차 대학살이 일어난 지 20년 후, 또다시 ‘오스만 튀르크’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 명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하는 2차 대학살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오스만 튀르크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에도 175만 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또 아르메니아인 60만 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그로 인하여 1894년부터 1915년까지 21년간 250만 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 명만이 살아남게 되어 러시아의 남유럽 진출 야욕으로 인한 소용돌이 속에 무려 22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터키인들에 의해 지구 상에서 사라집니다. 

1912년 발칸전쟁(1912~1913)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 튀르크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 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주어 러시아와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지요.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것입니다.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인 관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천만 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중국의 동북공정 획책이 날로 가속화되어가는 마당에 대책 없이 고구려 역사에 두서없이 보이는 한국의 냄비근성을 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치는 말

진실한 우리의 역사에 국민 여러분들이 목말라함을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위대하고 위대합니다. 혹자들은, 우스갯소리로 한국 민족사관의 역사는 운동권이 지켜왔다고 하지요. 이제는 모든 국민이 지켜나가야 합니다. 일본에 의해 의도되고 고도로 조작된 식민사관의 역사를 떨쳐버리고, 위대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길 바랍니다. 


강단 사학자들로 일컬어지는, 일제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무리 때문에 역사 공부하기 어렵거든 우리 주변국의 역사를 심도 있게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위대한 역사가 보입니다. 스리랑카에서도 고조선과 단군신화를 가르친다 합니다. 스리랑카의 식자층들은 자신들도 고조선의 후예라 믿고 있다 합니다. 이도 우리가 공부해 보아야 할 우리의 조각입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세길 기백이 출중한 역사학도들의 등장을 고대합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이 잘 읽고 댓글로 보여주신 폭넓은 학식과 견문에 절로 고개가 숙어지는 군요. 국민 여러분의 보지 못했던 훌륭한 면을 보게 되어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우선 전 역사학도가 아니기에 이곳에 적은 짧은 제 소견은 그저 미국유학시절 역사학도인 터키 친구로부터 귀동냥하였던 이야기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력이 되질 못 하여 더 파고들어 갈 수도 없지만, 여러분 중에 역사를 전공하는 분이 있고 또 기회가 된다면 돌궐의 高麗王(고려왕)에 대하여도 공부해 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용을 알게 된다면 제게도 좀 들려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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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 근무하는 Inkyu Park 선생의 말씀을 참고로 올립니다.]

중국의 21세기 국가전략프로젝트(한자로는 00공정)는 중국주변국에 대한 역사침탈작전이지요.. 서남공정/서북공정/동북공정/ 하상주 단대 공정//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승자인 중국에 의해서 수도 없이 왜곡/변조/날조/축소 되었으며 그 전초에는 사마천의 '사기'가 사기를 치고 있숨다. 근자에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고대사 7,000년이 날아가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명의 속국이기를 자처하면서 전국팔도에서 무려 3차례에 걸쳐 고대역사관련 서적을 수집하여 규장각에 보관했을것 같은데 이게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당했지 싶습니다. 요즘은 강단사학자로 칭해지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와 실증사학으로 대변되는 대부분의 잘못된 역사학자들의 아집과 오만을 넘어 위대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하는데... 최근 상생 출판사에서 총합본으로 발간한 '환단고기'가 많은 의문점에 해답을 제시해 주리라 믿으며 일독을 권합니다..^^* (강단사학자는 그 책이 위서라고 합디다만.. 소설을 써도 그렇게 쓰기 어렵습니다.) 
[ 박노흔 선생님이 정리하신 내용과 숙제]

Samuel Lee 님의 Turkey 관련 장문의 글의 내용이 우리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어 오랫동안 기억해두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공유하면서, 제 생각도 몇자 올립니다. 

***
정말 대단히 잘 읽었습니다. 머리가 시원해진 것 같습니다. 취미삼아 역사와 고고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분야중의 하나인 "돌궐(Turk)"에 대해 그간 이 책 저 책 보아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었는데,, 특히 돌궐이 서진하기 이전의 몽골고원에서의 부분에 있어서 집중력을 동원하여 읽었습니다. 알고자 하던 내용이다보니 순식간에 읽어버렸군요. 앞으로 몇번은 더 곰씹어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역시 역사교육이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나이 들어서까지 아는 사람이 드물지요. (일본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더 심하지요) /// 

1.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기 전에는 역시 소그드인(이란계로서 소그드인의 고분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사신들 모습이 있지요)의 영향이 도처에서 발견되는군요. 2. "테모안야브구"라는 명칭은 처음 접합니다 / 3. 고구려의 기층민족중의 하나가 돌궐이고, 돌궐제2제국(동동궐)의 기층민족이 고구려인이었다니 충분히 쉽게 상상이 갑니다. / 4. 민족간의 유전적 친소관계를 나타내는 유전자 DNA비교자료는 어딘가에 있을듯 한데, 찾아보아야겠네요. / 5.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가 돌궐의 위치라고 생각하신다 하셨는데, 제 기억으로는(국민학교나 중고교시절의 역사부도) 만주지역의 고구려 영토에 인접되어, 흉노,선비,돌궐,유연이 분명히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그들도 모두 Turk계열이니 어느 한 부족이 강성해져서 통일하면 그 이름이 전체의 이름으로 기록되고 하는 것이니, 결국 서로가 서로의 기층인이 되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한국사람들이 기억하는 근세이전의 돌궐관련 사항은 "안록산"일 것입니다.) / 6. 고구려도 예맥족의 하나이니, 돌궐과 고구려, 부여는 모두 같은 예맥족이군요. / 7. 언어적인 면에서 한국어는 중국어의 영향받고, 터키어는 아랍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페르시아어의 영향이 가장 컷을 것이고 그 다음이 아랍어, 희랍어, 슬라브어가 비슷하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봅니다. 용모에 있어서는 아나톨리아 고원 동부의 터키인과 서부의 터키인은 혼혈상대의 다양성에 차이가 나다보니 현재 용모의 차이가 꽤 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 8. 아르메니아는 참으로 가여운 민족이지요. 로마와 Partia제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던 "대아르메니아(Magna Armenia)시절의 위세와 영토(오늘날의 터키 동부와 이란의 서부를 포함. Van호수, Ararat산, 태브리즈 등을 포함한)가 그립겠지요. 기독교(카톨릭과 그리스정교 와는 다른 Armenian Church)를 최초로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로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인데 어느날 갑자기 흘러들어온 투르크인들에게 조상의 땅을 빼앗기고 학살당하고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 터키만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속이 터질 것입니다.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고대 희랍인들의 유산으로 터어키가 현재 막대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으니.. / 9.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신 우리나라 사학계의 행적에 대한 말씀, 동의와 동감입니다.

[숙제]
"Srilanka 에서 고조선과 단군신화를 가르친다"라는 부분이 와 닿지 않아, 제 뒷머리에 걸려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스리랑카인들이 많이 와있고, TV프로그램에서도 그들의 얘기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들이 이런 내용을 교육받았다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을텐데, 저는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아시는대로 좀 더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리랑카의 주된 인종이 싱할리족이고, 크게 보아 드라비다인(검은 피부)에 속하며, 모헨조다로(현재의 파키스탄)의 주인공이 바로 그 드라비다인이며, 기원전 2000년경에 현재의 인도의 다수인종인 아리아인에 의해 남쪽으로 축출되거나 혼혈되거나 사회하층민이 되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