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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hoiword2015.03.12 11:40
박윤선 목사님이 가정에 무관심했는가?>

- 박 목사님의 4남 박성은 박사가 전달해 온 내용을 영음사 편집부에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2013년 6월에 출간된 박윤선과의 만남 2권 393-394쪽에 실려 있습니다. -

“정암이 가정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래서 그는 자녀들 중 잘못 나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라는 소문은 그렇게 간단히 말할 부분은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뿌리 깊었던 유교적 가부장적 문화와 정암 자신이 겪은 일제시대의 엄격한 교육 및 청교도적 사고방식, 당시 한국의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위기감, 그리고 정암이 감당해야 할 엄청난 업무와 주석 집필 완수를 위한 극기적 돌진과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마는 성격 등을 고려하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암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요즈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듯 자녀 교육이나 보살핌을 어머니에게만 많이 일임하기보다 아버지로서 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친구 같은 따뜻함과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은 편한 태도로 많은 시간을 자녀들에게 할애하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며, 설사 반복되는 도덕적 잘못에 대해서도, 체벌을 하거나 너무 엄하게 다루지 않고 좀 자상하고 이해성 있는 아버지로 조용히 타이르는 아버지였으면 훨씬 더 나았을지도 모르며, 또한 당시로서는 좀 안정된 가정들이 할 수 있었던 가족 소풍도 자주 갖고, 또 그렇게 가정을‘ 내 팽개치고’ 홀로 수년씩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뭔가 달라도 달랐을 것이며, 혹은 당시 소수의 어떤 가정들처럼 민주적인 가정을 이루어 어머니께서 당신을 소위‘ 주의 일을 크게 하신다고’ 극진히 위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며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며, 또한 신앙을 너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식보다 순수한 신앙적 모범으로 참고 기다리면서 기도와 사랑의 권면으로만 진행했다면, 신앙에서 멀어진 자녀들이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암의 적지 않은 스킨십과 자녀들에 대한 관심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녀들을 위해서 내는 시간은 태부족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현대 교육 심리학에서도 온전히 대답을 줄 수 없는 일련의 가정이지 아무도 교육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어느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한다면, 당시 교회 또는 일반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그런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녀들에게 다가갔을까 하는 것이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한 그 시대의 아들인 아버지 정암을 일방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거나 쉽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박성은 박사의 생각이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정암이 실제로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가 극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남을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리 가깝게 지낸 자녀라 할지라도 그 판단이 객관적이지 아니할 수 있다. 사실 정암은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권위 의식은 매우 적었으며, 자녀들을 향해서 상당히 개방된 성품을 보인 편이었으며, 정암의 당시 수준으로는 지나치다 할 만큼 스킨십이 많아서 자주 가까운 이들과 자녀들을 손으로 귀를 꼬집어 잡곤 하였고(방지일 목사님에 따르면 정암은 젊었을 때‘ 귀쪽잡이’란 별명을 얻음), 장난치듯 큰 소리로 애칭도 부르고, 뺨이나 귀 등에 입을 맞추곤 하였다.

다만 당시 어떤 아버지들처럼 그리 자상하지는 못하였으나 자녀들의 조그만 성취에도 지나치리만큼 매우 기뻐하던 것을 박성은 박사 자신도 경험했고 또한 다른 분들로부터 그렇게 들은 바 있다. 아침마다 늘 울면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여러 가까이 모셨던 분들(주석 집필을 위해서 돕던 목사, 가까운 교계 인사들) 그 어느 누구도,“ 박 목사님이 그 자신이 학문과 신학 교육을 위해 세상을 모르고 사셨던 그 만큼 자신의 자녀들을 거의 무시하면서 관심도 갖지 않고 사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 그런 소문이 얼마나 크게 복음에 누를 끼칠까 생각하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박성은 박사 자신도 무한한 책임을 느낌과 동시에 또 하나님께도 참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박성은 박사는 개인적으로 그 소문의 객관성에 대해 적지 않은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암의‘ 자녀 소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다름 아닌 정암의 장성한 자녀들 한두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 정암 자신은, 그 비판의 진위는 고사하고 그가 그런 공격을 받았을 때, 그 말을 듣게 한 자녀들에게는 단번에 만족을 주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자주자주 깊이 반성하는 말씀을 많이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힌다. 정암은 그가 하늘나라로 가기 약 20년 전부터 “잘못 나간 자녀들의 책임은 다 내 몫이다”라고 하며 늘 자신의 과거 방법론에 대해 성찰하고 적지 않게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렇게 하므로 신학교나 가정에서 더욱더 인격적 대화에 시간을 내는 일에 더 노력한 것으로 안다.

박성은 박사에게 자주 이야기한 바로는 “얘, 성은아, 너는 너무 한 가지 일에 나처럼 집중하지 말아라. 좀 릴랙스(relax)도 하고 아이들과도 많이 놀아줘! 나는 너무 한 가지 일만 집중하느라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못 가졌단다”라고 말씀하며 그의 남은 생애에 조금이라도 더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