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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학자, 요한 칼빈


 

김재성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 김재성 박사(국제신대 부총장)

칼빈 탄생 오백주년 (1509-2009)을 맞이하여 그가 남긴 공헌과 영향력을 평가하는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서적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이 나왔다. 칼빈은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 신학과 교회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5대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라틴 교부들과 동방 교부들을 통합하여 네 명을 손꼽는데,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 등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을 종합하여 다섯 번째 교부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칼빈은 이들 초대교회 교부들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기독교 신학과 성령론을 제시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는데 기여했다.

(1)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의 등장

20세기에 저명한 개신교 역사학자 에밀 레오나르드 (Emile G. Léonard, 1891-1961)는 칼빈의 업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새로운 신앙인의 모습, 칼빈주의자” (a new type of man, the Calvinist)라는 명칭이 그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 칼빈주의자는 첫째, 윤리적으로 엄정하고, 둘째 고난과 박해와 시련에도 새로운 교회를 중심으로 믿음을 견고히 지켜내며, 셋째 직업의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를 말한다.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유형, 칼빈주의가 역사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당대 종교개혁자들의 장점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힌 신학자로, 사도 바울 이후에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정확한 가장 분명한 복음의 전파자였다. 칼빈주의는 가장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대명사가 되었다. 독일에서 등장한 루터파도 아니요, 스위스 쮜리히에서 시도되어지던 쯔빙글리파도 아닌, 새로운 유형의 교회와 성도들이 뚜렷하게 등장한 것이다. 새롭게 나타난 이들의 독특한 신앙적인 색채는 칼빈의 성경적 신학과 경건에 근거하고 있어서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칼빈주의자라는 호칭은 칼빈이 원했던 바도 아니요, 더구나 16세기에는 별로 좋은 의미로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챨스 5세 치하의 유럽 전 지역에 새로운 종교개혁이 퍼져나가면서, 루터를 따르는 독일지역과 쯔빙글리를 따르는 스위스 동맹으로 구별되었는데, 이들과도 다른 새로운 개신교 그룹이 칼빈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차츰 세계로 퍼져나간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회, 유럽 대륙과 다른 지역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17세기에는 청교도 신앙인들이 계승하였고, 한국에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정착되었다.

제네바의 사회사를 연구하여 세계적으로 저명한 칼빈 학자, 로버트 킹던 박사는 칼빈주의자들은 각 지역마다 새로운 교회에 관련된 통일된 사회공동체로 재구성하고, 조직화된 교회제도를 통해서 권징의 실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을 강조한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새로운 교회질서를 유지해나가는 구조가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칼빈은 스콜라주의에 빠졌던 중세신학자들을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다시 세웠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믿어야할 주요주제를 정리하여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성경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해설과 토론을 묶은 「기독교 강요」와 「성경주석」은 상호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는 도구였다. 그가 기독교 휴머니즘 학자로서 법학을 공부한 재능을 바탕으로 채택한 주제중심의 논증방식은 종교개혁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밝혀주었다. 칼빈의 저술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왜곡을 지적하면서 애매모호한 교회전통을 털어내고 성경적인 신앙진리를 밝혀주는 빛과 같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사상과 동시대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연구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걸작이다. 칼빈은 성경적인 기독교 진리의 회복을 염원하면서 어거스틴과 “칼케톤 신조” (451년)를 계승하고, 정확한 신학의 개념들을 정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 즉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교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서 창조적인 기념비를 세웠다. 칼빈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근면한 노동과 직업윤리를 정착시켰으며, 제네바 사회의 개혁을 일궈내어 사회 공동체의 조직적 건설에도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를 넘어서서 스위스 전지역으로, 프랑스로, 다시 네델란드, 영국, 독일, 동유럽으로 퍼져나가 종교개혁 시대에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경건한 신자들에게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칼빈은 피터 마터 버미글리 (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가 쓴 「신학총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버미글리는 이탈리아 출신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히브리어에 능한 휴머니즘 학자였는데, 개신교로 개종하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의 동지였으며, 노년기에는 쮜리히의 불링거와 같이 개혁운동을 위해서 헌신하였다.

칼빈은 성경적 설교, 제네바 교회의 재조직과 운영, 강해설교 중심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회복, 봉사와 권징의 확립,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근면과 직업에의 소명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엄청난 공헌을 남기게 된 칼빈의 기본적인 사역이자 제네바 교회를 개혁한 수단들은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설교를 통해서 제네바 시민들을 교화하고 도덕적으로 변혁하도록 하였다. 제네바 시는 세 지역으로 나누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하였다. 칼빈은 세 중에 어느 곳인가에서 성경에 따라갈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었다. 1541년 여름에 다시 돌아와서, 2년여 전에 떠날 때에 중단했던 그 다음 본문에 대해서 강해설교를 이어갔다. 25년 동안 약 4천편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풀어주었다. 설교의 역동성은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세계 칼빈 신학자들에게마저도 이런 성령의 신학자의 모습이 여전히 잊혀져있다.

둘째로, 칼빈은 당회를 통한 권징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제네바 시민들은 25명 내외로 구성된 목회자와 장로들이 시행하는 훈계를 순중하였다. 매년 당회원들은 시민들의 투표로 개편되었다. 당회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영적인 순결을 촉구하였다. 제네바 당회는 시의 도덕적인 질서를 세우는 일에 전적인 권한을 갖고 성도들의 행위를 감독하였다. 각종 음행들, 성적인 타락, 놀음, 과도한 음주, 방탕을 부추기는 춤추기 등은 당회 앞에서 고백하고 회개한 후 처벌을 받았다. 상업적인 거래에서 속임수와 고리대금도 엄격한 징계의 대상이었다. 1550년의 경우, 아직 칼빈의 지도력이 확고히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인데, 제네바 시민의 약 6.5%가 치리를 받았다.

당회의 처벌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개인적인 권고를 통해서 회개하게 하되, 비밀리에 당회에서만 반성토록 기회를 주고 마무리 되었다. 거의 대부분은 칼빈이 권면과 조언을 직접 제시하였다. 반성하지 않는다거나, 좀 더 심각한 범법자들은 회개와 반성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당했다. 아주 심각하게 공공의 안정을 해친 자들은 시정부의 처벌기관으로 이관되었다. 교회 전체 앞에서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회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성도들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규제할 수 있었다.

(2)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킨 종교개혁자

이처럼 위대한 종교개혁 시대의 탁월한 신학자 칼빈을 일컬어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평범한 성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릴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파격적인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칼빈을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무려 백 여 년이 넘게 이 칭호를 사용하여 왔으니, ‘공인된 칭호’가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혹자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려면, 그러면 칼빈에게 ‘성부의 신학자’ 혹은 ‘성자의 신학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므로 어떤 칭호든지 붙여도 가능하다. 칼빈은 제네바 초기사역에서부터 삼위일체 신학을 근간으로 제시했다.

Scripture and pious experience itself show us in the absolutely
simple essence of God,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개인적인 주관주의를 넘어서서, 칼빈은 성경에서 성령의 작용이 함께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제시로서 신봉하였다.

하지만 굳이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칭을 사용한 연유는 그의 신학체계에서 항상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성경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리에서 왜곡되어져 왔던 성령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제 위치로 회복되어졌기에 붙이게 된 말이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온전하게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정리를 함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회복시켰기에 칼빈에게 이 명예로운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성령의 권위를 빙자하여 태초부터 교회에 들어온 사탄의 모든 허구적 고안들이 날조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이슬람교 모하메드와 천주교의 교황은 성경에는 완전한 교리가 완전하게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좀 더 고차원적인 교리가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어 왔다는 것을 주장한다.  재세례파와 자유방임파들은 오늘 우리의 시대에 똑같은 수렁에 빠져서 미쳐있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가르침이나 교리를 소개하는 영은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복음의 가르침에 인을 쳐서, 그 가르침을 확증하는 일을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비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교황이나, 모하메드나, 직통계시를 받는다는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을 단호히 배척한다. 그들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부패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이다. 항상 보이는 우상을 통해서 위안을 삼으려는 인간의 어두운 욕심 때문에 영적인 어둠에 빠져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말하자면, 영속적인 우상의 제조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과 담대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감히 자기들의 역량대로 하나님 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거짓되고 허망한 우상을 하나님 자리에 대신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

끊임없이 우상을 생산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에는 교만과 대담한 무지가 가득 차 있다. 칼빈의 맑은 영혼이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칼빈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는 성령의 사역에만 의존하려 한다.

우리가 아직도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당대 혼돈을 극복하면서 정리해 놓은 것들과 그가 실천하였으며 실체로 남긴 유산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칼빈에게서 순수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확고한 기초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칼빈 한사람만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셨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개혁은 우연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16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교회를 개혁하도록 하였다. 루터, 쯔빙글리, 부써, 외콜람파디우스, 버미글리, 멜랑톤, 불링거, 파렐, 비레, 부겐하겐, 베자, 낙스, 무스쿨루스, 까피토, 쟝 스트룸, 피터 마터 버미글리, 미코니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쟌키우스 등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기여하였다. 그 시대의 기라성 같은 수재들이 곳곳에서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중요한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역할을 수행했었다.

지난 기독교 교회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이후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을 체계화한 인물로 칼빈을 손꼽고 있다. 세계 교회가 믿어야할 보편적인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종합적으로 찾아서 정리하고 세웠으며, 천년을 내려온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다시 한번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갱신, 예배의 갱신, 신학의 갱신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칼빈의 저서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3) 총체적 오류에 빠진 교회를 살려내다

칼빈은 성경의 모든 중요한 가르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노력한 신학자였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수정 보완하여 마침내 완성한 「기독교강요」 최종판 (1559년)에는 무려 26가지 중요한 신학 주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성경의 필요성과 신빙성, 참 하나님에 대한 설명, 삼위일체, 창조, 섭리, 타락한 인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율법,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리스도의 위격, 그리스도의 사역, 믿음, 회개,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부인과 묵상), 칭의, 선행과 확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기도, 선택이 주는 위로 (예정론), 최후 부활, 참된 교회, 교회의 권위와 권징, 세례, 성만찬, 교회와 국가 등이다. 그 어느 것 하나라고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자 본질적이 것들이다.

모두 다 잘 이해하여야 할 기초적인 성경의 교훈들이다. 칼빈은 각종 주제들을 성경에 비교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경건한 신앙고백과 같고, 순수한 성경적 해석과 진술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설교처럼 토로하는 열정을 담아놓았다. 그리고 그 행간에는 어느 주제에서나 성령의 사역을 빼놓지 않고 연관 지어 설명하여 놓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성을 건설하여 놓았다.

성경적 신학자로서 칼빈이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문제점을 수정하고자 제시한 핵심적인 내용들 가운데서 성경관, 신론, 기독론, 교회관, 구원론, 성례론, 설교론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따르면, 구원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고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성직주의와 독선적인 주장들로 인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와 성령의 적용사역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가 적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주장하여, 제 자리에 되돌려 놓은 신학자이다.

칼빈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신학, 특히 결정적으로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새롭게 제시했다. 면죄부와 고해성사, 미사참여로 혼돈을 겪고 있던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미신적인 신앙행태를 제네바 교회에서는 완전히 철폐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촛불을 밝혀놓고 성자들의 공로에 의지하려는 기도는 금지되었다. 성령의 신비로운 작동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이 개인에게 믿음을 주며, 말씀으로 교회에 감동을 주신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구원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적용사역에 의하여 결정된다. 성령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간의 심령에 심어지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겨나고 만들어진다. 성경은 성령에 의하여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써 놓은 책이기에 성령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서 구원사역에 동참한다. 성령은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를 창설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며, 모든 구원의 방편들을 활용하여서 성부의 계획이 성자로 인하여 성취되었고, 이를 적용하고 보전하는 구원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사에서 성령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체계화한 최초의 신학자가 바로 요한 칼빈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과 교황제도의 비성경적인 문제점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은 고집스럽게도 성례 중심의 신앙생활과 성직자 중심의 구원론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는 옳바른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16세기에 칼빈이 성령의 주권을 회복시켜서 제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교회, 특히 성직자가 실시하는 성례를 통과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에 값없이 주어지는 죄사함으로 인해 의롭다하심을 받음과 동시에 죄의 저주가 더 이상 우리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된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을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 같은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조롱하기까지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의 철학이 그러하다.”

칼빈은 성령의 역동적 사역을 깊이 인식하여 성경적 신앙을 정립하였고, 설교사역, 성경의 해석, 기도생활, 각종 목회활동에서 성령의 감화력을 강조하였다. 칼빈의 확신에 찬 설명을 들어보자:

“도덕적 추측에 관계된 궤변론자들의 쓰레기 같은 주장들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다. 그들의 그런 주장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심령이, 망상에 사로잡혀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그들의 심령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그들의 그러한 반론에 대하여 답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는데, 실제로 사람이 자신만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주는 분은 오직 성령이라고 강조한다.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고 명백하게 실현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신학자’라고 해서 칼빈이 오직 성령론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는 종합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어야할 보편적 교훈을 성경에서 찾아서 바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일생동안 강단에서 외쳤고 신학생들에게 강연하였고, 때로는 잘못된 가르침을 제거하기 위한 논쟁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논쟁에서 취한 엄격한 자세와 명쾌한 분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네바에서 행한 ‘권징’ 때문에 칼빈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마 가톨릭은 말할 필요도 없고, 루터파, 자유파, 재세례파, 심지어 같은 쮜리히에서 활동한 쯔빙글리파 개혁주의자들도 때로는 칼빈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쟁자들이 쏟아놓은 비판의 내용들은 칼빈의 신학에 대한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말았다. 이런 비판자들로 인하여서 밤잠을 설치면서 남긴 칼빈의 저술들이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성령의 신학자’ 칼빈을 잘 모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면, 제발 세계 신학계에서 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바란다. 왜 이런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연구해 보고 찾아보기를 권유 드린다.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면서, 성령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고 심령의 평안을 얻게 된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깨어지기 쉽고, 온갖 연약한 것들이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위협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그런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무수한 악들에 의해서 압도당하지 않게 하시며 충분할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아울러, 성령이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신음하고 탄식하며 우리의 속량을 향하여 힘써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증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복음과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할 때에 칼빈의 해석들은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히 12:2)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지 한 사람 유명한 신학자에게 얽매여서 정통성을 주장해보려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했다는 몇 마디에 따라서 성령에 관한 유명한 격언이나 소개하면서 그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빈을 인용하되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거나, 유식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지식인의 속임수요, 오용이자 남용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활용하여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파하려면 ‘성령의 주권적 사역’을 이해하여야 한다. 칼빈은 성령의 역사와 성경전체의 가르침과의 근본적인 연계성을 강조한다. 그는 성령을 떠나서, 성령의 간섭이 없이는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거나 교훈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서 계시가 선포되고 알려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하는 칼빈의 교리적 설명들을 그냥 교과서적으로 암기하거나 그저 나열하는데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칼빈의 교리에 대한 교과서적 암기는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므로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이 형성된 지 거의 오백 여년이 흘러갔는데도 세계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큰 감화를 받고 있는 것은 그의 신학에 담긴 신선함과 역동성 때문이다. 칼빈의 저술들 중에서 어떤 부분들은 우리 한국에 사는 성도들에겐 다소 어렵다고 느껴질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분하게 그의 글을 읽어보면, 복음을 갈망하던 청년 칼빈이 점차 성장하면서 성경에 담긴 성령의 역동적인 사역과 인도하심을 통해서 확신과 위로를 발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중세신학이 신비주의와 모호한 영성신학에 빠져서 잃어버린 성령의 사역을 선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체계를 참고하여 명료화했다. 그의 여러 저술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종합적인 안목과 그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확실한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글은 어디를 펴 놓아도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게 된다. 바로 성경에 담긴 성령에 관한 교훈이 그대로 살아있다. 기독교 성도들은 성령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지혜로 인하여 오늘의 혼탁한 사상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분별력을 갖추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이 말씀은 율법주의와 바리새적인 교육을 받아왔던 사도 바울이 복음에서 터득한 엄청난 확신의 토로였다.

성령의 사역을 확신하게 된 칼빈의 경우에도 마치 바울 사도의 감격과 같은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신앙내용을 터득하여 제시해 놓았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이를 따르게 되면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개혁주의 전통과 유산을 선교사들을 통해서 물려받았고, 성경적이며 종합적인 확신을 더욱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성령의 신학자’라는 다소 거창한 명칭을 칼빈에게 수식어로 붙이게 된 이유는 그가 오직 성령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치중하여 사역했다거나 신학저술을 발전시켰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칼빈의 신학이 오직 성령론 한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다거나, 성령론만을 전문으로 연구한 신학자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추호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칼빈은 성령의 능력 체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거나, 성령의 체험중심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처럼 편향성을 가진 신학자가 아니었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의 발전 역사에서 오직 성령론이라는 한 분야에 관하여서만 공헌을 남긴 것이 아니다.

사실 칼빈은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종교개혁을 총망라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거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가 기독교 신학사의 발전사에서 남긴 선구자적인 공헌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나님을 아는 교리 (인식론)의 확립, 경건 신학의 정립, 기독론에서 신성과 인성의 교류, 예수님이 맡으신 삼중직 (선지자, 왕, 제사장) 에 대한 교리, 구원론에서 칭의와 성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교리들, 고해성사의 허구를 갈파한 점, 구원의 확신과 예정론의 옹호, 교회론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 직분론의 확립, 장로제도의 회복과 교회의 독립권 쟁취, 세례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헤아릴 수 없는 신학 주제들에 대해서 최초로 명쾌한 교리를 체계화한 신학자였다. 가히 기독교 신학의 발전역사에서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공헌을 남겼다. 역시, 성령론 분야에서도 칼빈은 종교개혁의 혼돈기에 가장 명쾌한 성경적 체계와 해석을 세워 놓았다.

신학자들이 앞 다투어서 칼빈에게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호칭을 헌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명칭을 붙이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칼빈이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주권적으로 구원을 적용하는 저자라는 적합한 호칭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장악하여 행사하고 있던 구원의 적용이라는 권세가 모순임을 적발하고 지적하였다. 구원은 오직 성령의 주권 하에 있으며, 그 구체적 적용 사역들은 교회를 통해서 성직자들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가운데 자유롭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이 친히 주권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는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성령의 신학자‘라는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16세 유럽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총이 전달된다고 주장하여, 결국 성령의 사역을 무력화시키고 로마 교회에 종속시켜 버렸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로마 교회가 구원의 적용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쾌한 성경적 주장을 함으로서 성령의 위치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하여금 그 위대한 구원 사역의 창시자이자, ‘양자의 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새로운 영을 불어넣은 분이라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칼빈이 이를 가장 먼저 체계화하여 올바로 가르쳐 주었고, 그 후로 교회들이 이 기본적인 복음의 기초를 잘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입각하여 체계화한 나머지 매우 정교하면서도 딱딱한 교과서처럼 정리하지 않고, 칼빈 자신이 먼저 성령의 역동성과 권능과 감화력을 실제로 체험하여 구원의 여러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사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풀이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의 저술들을 읽을 때에는 어디서나 성령의 역사하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심장을 느끼게 되며, 성령에 감동된 중심에서 나오는 매우 신선하고 순수하며 고결한 감동을 받게 되어진다.

(4) 워필드 박사,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

칼빈의 성령론이라는 주제가 결코 잊혀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지적을 처음으로 강조하신 분은 지금부터 백여 년 전에 미국에서 칼빈 연구의 기틀을 세우신 워필드 박사였다. 필자가 확신을 갖도록 눈을 열어준 것도 역시 워필드 박사가 남긴 칼빈 연구 논문들 속에서였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연구업적은 훗날 영국과 북미주에서 많은 후배 학자들의 칼빈 연구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필자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할 때에, 마크 놀 (Mark Noll) 박사에게서 “프린스턴 신학”이라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매주 그가 발표한 프린스턴 신학자들에 관한 논문과 저술들을 섭렵하는 한편, “워필드 박사의 경건과 성령이해”를 학기말 논문으로 제출하면서 상세히 연구하였다.

1909년, 칼빈이 출생한지 400주년이 되던 해에도 미국 남부 죠지아주 사바나에서 칼빈 탄생을 기념하는 대회가 개최되었다. 워필드 박사가 초청강연을 맡았었다. 당시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하던 워필드 박사는 그 해에 칼빈에 관한 논문을 무려 일곱 편이나 쏟아 내놓았는데, 영어권에서 칼빈의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기초석이 되는 훌륭한 연구 성과였다. 박학다식하여 많은 방면에 지속적인 논문을 펴낸 워필드 박사는 “최고의 신학자, 칼빈”이라는 논문에서 “그 어떤 이름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이 칼빈에게 합당하다”고 선포하였다. 그 후로, 주요 칼빈 신학자들이 이를 다시금 재인용하면서 강조하였다. 워필드 박사의 연구 성과 이후로 여러 칼빈 학자들과 성령론 전문가들이 동의를 표시하였고, 이젠 확고한 명칭으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란 교리는 칼빈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다. 물론, 칼빈이 이것을 개발한 것은 아니다...그러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조직적이요 적합한 표현을 제시한 첫 번째 신학자 가 바로 칼빈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의 사역들에 대해서 확실한 소유를 하게 되어졌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칼빈이 끼친 공헌들이 많다는 평범하게 받아들여져 오고 있는 견해를 훨씬 능가하는, 이 보다 더 놀라운 교리사의 현상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의 여러 저술을 완벽하게 독파한 연후에,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가장 뛰어나게 강조하고 제시한 신학자라고 특징을 지은 것이다.

“따라서「기독교 강요」라는 책은, 죄악된 인간을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며, 죄악된 인간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논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워필드 박사의 주장은, 그 이전에도 그러하였듯이, 또 다시 20세기 초엽 영어권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성도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자유주의신학, 실존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등은 칼빈의 성령론을 덮어버렸다. 특히,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의 신학체계를 제시되면서 칼빈의 성령론은 완전히 묻혀 버리고 말았다.

다른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는 칼빈의 신학사상이 너무나 신학적 과학과 같이 논리적이며,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의 논쟁부분에서는 너무나 자기 주관적이라고 논평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워필드 박사는 칼빈에게서 그처럼 편협한 마음을 가진 교리주의자의 면모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려고 노력한 신학자였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죄인으로서 접근하였다.”

칼빈의 성령론을 연구하면서 워필드 박사가 주목한 부분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사역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비록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구원론에 다소 주관적인 면모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요, 오히려 구원의 이해를 가장 바르게 접근하여 제시한 훌륭한 이해라는 것이다. 구원은 각각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제공 되어지는 것이므로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 오히려 구원론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생명의 창조자요, 저자요, 수여자라고 칼빈이 이해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적용자로서 성령의 사역을 가장 강도 높게 주장하였다. 구원의 적용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워필드는 성령의 증거사역에 대해서도 칼빈이 가장 적절한 설명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칼빈이 개혁주의 교회에 기여한 것은 성령의 증거라는 교리가 가장 기본적인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진실함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에 의존할 뿐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체 안에 스스로를 입증하는 확증을 오직 성령의 내적증거로부터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이 계시하는 자는 아니다. 성경 속에 담긴 계시의 확증자로서 성령은 성경이 스스로 입증하는 본질을 확실하게 증거하여 주는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칼빈이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음을 주목하였다: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것은 구원의 초자연주의로서, 이는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 하나님의 긴밀한 사역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워필드는 당대 신학자들이 진화론과 같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빠져있어서 초월적이요 초자연적인 차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칼빈의 초자연주의가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는 교리적 해결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구원의 초자연주의라는 일관된 교리야말로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워필드 박사의 칼빈 해석을 지지하는 최근 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죤 머레이 교수는 "칼빈은 매우 합당하게 성령의 신학자로 명명되었다“고 하였다. 머레이의 뒤를 이어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최근 성령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술을 많이 남긴 리챠드 개핀 교수는 비록 널리 인기 있는 해석은 아니라 하더라도 워필드의 지적을 지지하였다.

개핀 교수도 역시 워필드 박사의 해석에 동의하면서, 성령의 내적 증거로 인하여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진리성에 대해 확신을 주는 칼빈의 주장이야말로 교회가 칼빈에게 빚지고 있는 매우 뛰어난 확증이라고 인정하였다. 개핀 교수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제 3권 구원론에서 논의하는 것들 중에 성령에 관한 언급이 특별히 주목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칼빈은 개인적인 죄인의 체험 속에 구원의 적용을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성령론의 논의가 적절하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퍼거슨 교수는 가장 최근에 펴낸 성령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교과서적인 저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가 칼빈의 성령론에서 가장 핵심이며 이후 개혁주의 구원론의 뼈대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다른 논문에서도 역시 성령의 신학자 칼빈의 설명들이 얼마나 중요한 초석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워필드 박사의 선언과 이를 지지하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들이 담긴 칼빈의 성령론에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살펴본 바, 비록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명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언을 하고 난 후에 좀 더 그 주장을 입증하는 상세한 연구를 더 이상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아쉽게도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령론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학자가 후대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 성령관련 내용만을 집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논문들에서지만, 워필드가 칼빈의 성령 이해에서 발견한 핵심은 결코 가볍게 취급할 내용이 아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결국 “칼빈주의가 특별히 주장하는 초자연적 구원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 속에서 성령이 친히 즉각적으로 역사한다.” 다시 말하면, 워필드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 자연주의적인 신학이 세력을 펼치는 상황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초자연적인 근원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구원의 지속적인 초자연주의는 칼빈주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일부 칼빈 학자들에게는 아직도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다’라는 선언이 간과되고 있지만, 옛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는 여전히 이를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죤 머레이 교수는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매우 합당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칼빈의 성경해석과 신학전반에 성령의 사역이 균형 잡혀 있다고 하였다. 리챠드 개핀 교수, 퍼거슨 교수, 그리고 갓프리 교수 등은 모두 다 워필드와 죤 머레이의 해석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에버딘 대학교에서 죤 오웬이라는 퓨리턴 신학자를 연구하여 “기독신자의 생활에 관한 교리” 로 박사학위를 받은 싱클레어 퍼거슨 (Dr. Sinclair B. Ferguson) 교수가 당시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개설한 과목이 바로 “칼빈의 성령론”이었다. 필자는 박사과정 첫 학기 첫 과목의 제목에서부터 엄청난 충격과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이때부터 필자는 매우 생소하게 느껴진 바로 이 성령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새로운 칼빈 신학에의 해석을 시도하고자 노력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필자는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가장 잊혀진 부분이 성령론 분야임을 입증하면서 전체 칼빈 저술을 통해서 재조명했다. 마침내, 「그리스도와의 연합: 칼빈의 신학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라는 박사 학위논문이 완성되어졌다.

2009년은 칼빈 탄생 오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성대한 세계 칼빈 연구자들의 학술대회와 기념행사가 있었다. 필자가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달라는 심사위원회의 연락을 받았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필자가 발표한 글을 통해서 다시금 조금이나마 칼빈주의 확장사 연구에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면서 일주일간 지속된 세미나 시간에서도 칼빈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서 짧은 강의를 맡았는데, 필자의 연구내용을 경청했던 많은 칼빈 학자들의 격찬을 받게 되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교 법학교수 스킬 박사는 월스트릿 저널 기고문에서 이번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오백주년의 의미를 세계대륙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에 대한 확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간다의 대주교 헨리 옴브리가 설교한 것과 한국의 칼빈 학자로 김재성 박사가 ‘아시아에서의 칼빈주의’를 발표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발표문을 포함하여, 이날 발표된 칼빈의 시대, 사상, 영향 등은 귀한 연구자료가 될 것이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연구하는 죠엘 비키와 파이파 교수 등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워필드 박사의 주장을 기본으로 따르고 있다. 최근에 비록 소수이지만, 칼빈의 성령론을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논의를 다루고 있어서 유익한 도움을 주고 있다.

(5) 칼빈의 영향과 칼빈주의 성령론의 발전

칼빈의 신학사상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 그쳤다면 오늘날 ‘칼빈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거대한 신학적 유산과 교회들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세계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신앙이었기에 지역과 언어를 초월하여 널리 공감대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생생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에게 공감하면서도 각각 자신들의 시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칼빈주의 신학은 다양하게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핵심에 해당하는 중요 교리가 바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점을 공통분모로 삼았다.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적용을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는 가운데서만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어졌는데, 이는 칼빈 이후로 모든 칼빈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신학사상이 되었다.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활동한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칼빈은 신학적인 영향력은 실로 방대하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칼빈의 위대한 신학사상은 후대의 신학자들과 경건한 성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주제들은 칼빈에 의해서 체계화 되었기에 후대의 성도들은 편리하게 분별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17세기로 내려오면서 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를 규명하는 「신학서론」 (prolegomena)이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의「기독교강요」의 첫 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발전시킨 해답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삼위일체론을 비롯한 신론, 하나님의 경륜과 언약, 성경과 계시의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 사람이자 하나님이신 분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한 설명, 구원론의 전체 과정과 예정론의 이해, 기도의 실제와 이론, 교회의 직분과 권징, 세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등 기독교신학에서 다루는 핵심 분야 전반의 발전이 칼빈 사상과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범위를 좀 더 좁혀서 살펴보려는 성령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도, 정통 신학을 세우려는 17세기 기독교 교리학자들과 퓨리턴들, 그리고 최근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자들은 연속성을 갖고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20세기 초엽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이 여러 개의 교단을 형성하면서 마치 성령론을 부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오순절파 교회들만이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야에서 본 것이다. 칼빈주의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성령이 없었다거나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신학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1907년 미국에서 오순절파의 방언운동 이후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어졌다는 주장도 잘못된 말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 한 가지에 해당하는 방언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미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하여 믿음생활을 경주하여 왔고, 철저히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경건을 힘써왔던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장로교회에는 성령이 없어서 힘이 없고 나약하며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버려야만 할 것이다.

칼빈 당대의 문서들과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요약한 성령론을 들여다보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와 강조에 있어서 연속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칼빈의 성령론에서 강조되어진 것들이 역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앞에서 워필드 박사가 지적한 칼빈의 성령론에 나오는 것들이 주로 칼빈주의자들의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은 모든 교리의 핵심으로서 신학의 전반에서 다루어졌으나, 오늘의 성도들과 교회 사역자들이 철저히 연구하고 조사하지 아니하여 무지하게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하이델베그 교리문답서에 핵심적인 교리들은 모두 다 성령에 연계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사역과 승천과 중보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동역과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중생, 성화, 믿음, 기도, 확신, 영적 전쟁, 종말론적 기대, 설교, 성례들에 관련되어 있는 성령의 적용적 사역을 다루고 있다. 거의 모든 구조와 문항에서 성령의 사역이 관련을 맺고 있다.

1563년에 독일에서 나온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가 작성한 간단한 신앙교본이다. 이 문답은 독일 남서부 지역의 영주 프레데릭 3세가 종교개혁의 시대에 자기의 영지 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통일된 신앙을 갖추어 주고자 만들게 된 문서였다. 독일에서는 ‘영주의 신앙이 곧 그 지역의 신앙이다’는 원칙을 결정하였으므로 그는 객관적인 신앙에 대한 안목을 추구한 나머지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멜랑톤에게 배운 우르시누스와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올레비아누스까지도 초청하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서술형식이 아니고, 질문과 답변 형태로 되어있다.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무학자들과 문맹자들이 쉽게 깨닫도록 하려는 교육적 의도에서였다. 총 129개의 문답에 들어있는 내용들은, 성령에 관계된 내용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의 칼빈의 주장들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

첫 문답에 핵심을 담았는데, 사람에게 유일한 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며, 성부의 섭리적 보호와 우리 안에 감사하는 마음과 영생의 확신을 창조하는 성령의 사역이다. 3-11문까지 죄책과 불행을 다루면서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나야함을 밝힌다. 21문에서 성령은 믿음을 창조한다고 되어있다. 우리 인간들이 죄의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제 8문답).

칼빈이 「기독교강요」제 3권 1장 4항에서 “믿음은 성령의 기본적인 사역이다”고 주장한 말과 제 3권 2장 7항에서 믿음에 대하여 개념을 정리한 것이 거의 그대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도 들어있다. 즉, 성령이야말로 믿음의 저자이라는 점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들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에게서 온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게 하신다” (제 65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믿음의 정의를 내린 제 21문답은 거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같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이다. 곧 순전한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이다.”
제 21문과 22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제 24문답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설명한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는 구속주로, 성령은 우리의 성화를 관장하신다는 경륜적 사역의 구별,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외적사역에 관한 구분을 칼빈이 설명한 바와 같이 풀이하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칼빈의 성령이해는 먼저 삼위일체론에서 나오고 있는데, 각 위격이 담당하는 사역을 구별하여 설명한 바 같다.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라서, 24문에서 64문까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사역을 풀이한다. 제 53문답에서 “성령은 첫째,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였다.

65문에서 82문까지는 은혜의 수단들을 다루는데,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믿음을 창조하고 확증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룬다. 성례를 규정한 68문답과 세례에 대한 설명 (제 70문답, 73문답)들도 모두 칼빈의 성령론과도 깊은 연계성이 발견되어진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칼빈이 성령의 사역에서 손꼽는 구원의 적용사역 가운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령의 역사하심인데 역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도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연합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 76 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 더 연합됨을 의미한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의 참된 몸은 하늘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심을 확증한다 (제 80문답)


마지막 부분, 86문에서 129문까지는 성령을 주제로 우리가 감사하는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가를 다룬다. 십계명을 간추린 질문들에서 성령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고, 기도에 대한 부분에서도 줄곧 언급되어져있다.

2) 돌트 신경

16세기 후반에 큰 희생의 기초 위에서 개혁주의 교회를 발전시킨 네델란드에서는 1618년에 알미니우스파와의 신학논쟁을 통해서 돌트 신경을 작성하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을 강조한 다섯 가지 조항을 담고 있기에 성령에 관한 내용을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칼빈의 핵심 강조점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한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에게 외부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도록 역사하는 성령에 의하여 말씀 선포의 사역이 필수적이라고 선언하였다.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증거사명과 선교를 강조하였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의 “회심”

영국과 미국에서도 청교도들도 성령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해석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 성령에 대한 언급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42회, 대요리문답에서는 38회, 소요리문답에서는 10회나 언급되어있다. 청교도 신학자들은 확장된 성령의 이해를 추구하면서, 성령의 신성,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의 인격,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의 관련성,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개인에게 적용사역을 하는 주관적 영역과 성도들의 삶에서 인도하심과 객관적인 사역 등이 다루어졌다.

회심체험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종교개혁 이후로 세대가 점점 흘러가면서 아무런 열심도 없는 명목상의 기독교신자가 많이 양산되어갔다. 16세기 후반에서부터 18세기 초엽에 이르는 청교도들의 시대는 기독교인이라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외형적 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위선적인 기독교인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분별하고자 회심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의 신앙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세대가 흘러가면서 그에 합당한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 것이라고 본다. 참다운 신앙을 점검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하였는데, 죄인이 회개하였다는 경험을 목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점검하였고, 교회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워필드 박사는 “퓨리턴 사상은 총체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즐겁게 연구하는 정신으로 거의 가득 차 있다고 본다”고 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와 대, 소 요리문답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성령이 사람의 심장 속에서 내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서 역사하되 성령의 외적인 도구를 통해서 역사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우리의 심장 깊은 곳에 다가 새로운 생명과 권능을 심어서 효과적으로 죄를 쫒아내고, 죄인을 복음에 반응하도록 가능하게 하고 기꺼이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한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신학자들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목회자들의 공적인 말씀 선포사역과 개인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맺어야할 열매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였다.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굳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피조물로부터 즉각적으로 흘러나오는 뛰어난 결정체들은 회심에 대한 열망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이라고 썼다. 굳윈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루시며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들은 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요 또는 무너진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심을 일으켜서 거룩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고 하였다.

영국 청교도 최고의 신학자 존 오웬의 성령론은 성령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 연구에 담겨있다. 청교도 교과서를 저술한 신학자 오웬은 성령론에 주목하여 좀 더 심화된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성령의 인격과 개인 성도의 생애 속에서 역사하심에 대해서 상세한 풀이를 하였다. 오웬의 저작전집 4권에서는 성령과 성경의 권위, 조명, 기도, 영적인 위로, 은사들을 실제적으로 풀이했다. 오웬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남긴 유산을 연구하면서 왜 아직까지 성령에 관한 교과서가 한권도 없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묶어서 제시하였다.

오웬을 비롯한 위대한 퓨리턴들이 총망라되어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는 무려 5년간의 산고 (1643-48) 속에서 나온 기도의 결정체였다. 이들 17세기 절정기의 영국 퓨리턴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강조를 성경과 연결시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에 그대로 담아 놓았다. 간단히 지적하자면 칼빈의 성경관처럼 성령의 내적 증거사역을 강조한 것부터 연속성을 입증해준다.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

회심은 성령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성령은 두 가지로 동시에 일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말씀이라는 도구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해와 확신을 불어넣으시고, 이와 동시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여 일어나게 되는 특수한 것, 매우 예외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기대하였다. 따라서 회심을 기대하던 퓨리턴들은 점차 성령의 축복을 어떤 예외적인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여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돌보아 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라야 하는데 다소 지나치게 이것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쉐퍼드의 책, 「진정한 회심」(The Sincere Convert, 1643)이란 책에는 “참된 신자의 소수를 분별하기; 그리고 구원받는 회심의 엄청난 어려움”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칼 바르트에 의해서 확산된 신정통주의는 청교도 신학자들이 칼빈의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언약사상을 비난했다. 칼빈을 비롯한 16세기의 기본적인 개혁주의 입장과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청교도 신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후대에 조금씩 다른 독특성을 추가하기도 했다고 비판한다. 청교도들이 너무나 완고하게 구원을 얻기 위한 회심체험을 매우 강조하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미리 준비를 하게 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20세기 중엽의 신정통주의자들이 17세기 청교도들의 시대적 과제를 온전히 이해한 것일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도 앞선 세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과연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확하게 잘 파악하였을까? 시대마다 장소마다 신학적인 강조점과 방법론이 약간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17세기라는 시대적 환경은 전혀 그 이전 세대와는 달라졌다. 영국과 미국 신대륙에서 새롭게 대응해야할 심각한 문제점들이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퓨리턴들은 하나의 규칙을 생각하고 있었던 바, 죄의 확신은 율법을 선포함으로 촉발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을 갖기 전에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 면 그 누구도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알기 전까지는 구원을 받고자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매우 강조되었던 믿음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한 요점으로서 퓨리턴의 회심 교리에서 강조된 매우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준비 단계의 지식이나 확신만을 가지고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할 수 없다.

“준비단계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우리는 확고한 내적인 자격들을 이해하게 되어지고, 죄의 상태에 있는 영혼의 육적인 요소와 율법과 복음의 동시적인 사역 가운데 새겨진 회심과의 사이에 도달한다. 성령의 동시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영혼은 즉각적으로 믿음의 사역에 들어가게 되는데, 예를 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되 후기 퓨리턴의 거장 리챠드 백스터의 경우, 복음의 선포와 요리문답 교육을 지속하므로 키더민스터에서 행한 그의 목회사역은 많은 열매를 맺었는데, 17년 동안에 무려 육백 명을 회심시켰다. 18세기 마지막 퓨리턴에 해당하는 토마스 보스톤의 경우에도 들과 산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처음 그가 성찬을 베푼 사람들은 60여 명이었지만, 20여년이 지난 후인 1731년에 시행한 마지막 성찬에는 777명이나 참가하는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모두 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의 비판에 직면했었다.

스코틀랜드 칼빈주의 신학자 제임스 뷰캐넌의 성령론 교과서에서도 역시 퓨리턴 전통에서 중요시되어온 회심 사역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졌다. 죄인을 회개케 하시는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데 집중하였다.

4) 부흥운동과 특별한 체험

칼빈의 성령론이 영향을 끼친 개혁주의 부흥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 미국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죠나단 에드워드 (1703-1758)와 죠지 휫필드 (1714-1770)가 이끌던 개혁주의 부흥운동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독특한 회심체험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자극을 받아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칼빈의 입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들은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 가운데서 부흥의 중요성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이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칼빈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었고, 직면했던 신앙인들의 문제점들도 전혀 달랐다. 지금도 부흥운동은 성령의 특수한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주권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도 일상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흥운동은 교회 안에서 다시 체험을 유발하고 있고,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에드워드는 부흥운동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인류의 타락 이후로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 면에서 볼 때에는 구원의 사역이란 하나님의 영의 놀라운 전달수단에 의해서 주로 수행되어졌다고 관측되어진다. 비록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영향이 평상적으로 일반적인 범위에서는 항상 있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위대한 일을 수행하도록 함에 있어서 취해진 방법은 항상 놀라운 표출이 일어남으로 시행되었는데, 특별한 긍휼의 열매들이 맺히는바 우리의 임무를 지금부터 더 앞으로 수행함으로써 충분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령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 부흥운동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부흥사가 부흥의 방법론을 확산시켜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부흥사들이 영광을 받거나, 부흥을 일으킨 현장 즉 어떤 특정한 교회가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휫필드는 자신들의 사역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하였다. 휫필드는 교단을 초월하여 부흥운동의 도구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였다. 마이크가 없던 시대에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이 바람결을 타고 널리 퍼지는 특수한 현상들을 체험하였다. “회심하지 않은 목회사역의 위험성”이라는 설교에 담긴 내용들을 당시 미국 장로교회 부흥운동가 길버트 테네츠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휫필드에 이르러서 뉴잉글랜드와 영국 장로교회는 설교의 강조점이 달라졌는데, 준비단계를 강조하기 보다는 즉각적인 회심을 호소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한 웨슬레의 설교에서 나온 영향이기도 하다.

5) 인간중심적 부흥주의와의 충돌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령론이 점차 소원하게 다루어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일어난 잘못된 부흥운동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부흥운동은 개혁주이 신학이 강조하여 온 기본적인 주제들 보다는 사람들의 현장체험으로 치우게 되어졌다. 따라서 개혁주의 진영은 전혀 부흥운동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성령의 일상적 사역에 대해서만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흐름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챨스 피니 (Charles G. Finney)가 주도한 19세기 초기 부흥운동은 1837년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 (New School)로 나뉘어졌다. 에서 나타났다. 피니는 부흥설교에서 먼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도록 자극했다. 성령이 설득하는데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깨닫고 듣는데 심리학적인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회심하도록 유도하였다. 피니의 인본주의적인 부흥설교는 성령에 대한 신학적 곡해이자 나쁜 방법론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죤 네빈은 부흥운동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피니의 방법이 지닌 모순점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미국적 낙관론과 복음적인 알미니안주의와의 혼합“으로 전개되자 개혁주의는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무디 (Dwight L. Moody, 1837-1899)의 부흥운동은 피니와 다르다고 확신하였던 챨스 핫지 박사가 적극 후원하였고 신학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지도해 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령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당대의 잘못된 성령운동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워필드 박사는 로마 가톨릭, 알미니안주의자들, 웨슬레안들, 퀘이커주의자들, 정숙주의자들, 케직사경회 운동 등에서 ‘완전주의’라는 공통분모가 발견하였다. 이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죄에 대한 기본인식이 잘못되어 있다고 설파하였다. 죄가 현존하는 한, 인간이 율법의 조항을 완전히 지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이 너무 가볍게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워필드는 특히 챨스 피니의 부흥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하심에 대하여 방대한 저술로 복원시켰다. 성령의 중생 사역을 강조하면서, 유아세례의 이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점차 감리교회와 부흥운동이 인간적인 방법론 (Methodism)에만 치우게 되면서, 기본적인 교리와 신학을 무시하고 신앙고백의 중요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를 간파한 아브라함 카이퍼는 일찍이 감리교회에서 강조하는 회심체험을 위한 부흥회는 축소주의적이요, 펠라기우스적인 부흥회라고 공격하였다: “감리교회는 성례의 예민한 감각을 죽여 버린다; 그것은 매우 차가운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교제를 무시해버린다. 신앙고백에서 제시한 진리를 무제한적으로 무시하도록 만든다. 우리 주 하나님이 육십 육권으로 된 아주 두꺼운 책을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생각하라고 주셨는데, 감리교는 그 복음을 싸구려처럼 쓸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은 자발적인 조직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은혜롭게 주어지며 경험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와 20세 초엽,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워필드의 영향으로 인하여서, 미국 개신교회에서는 구원의 집행자로 역사하는 성령의 모든 사역들을 다시금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알렉산더 핫지도 역시 성도의 믿음생활에 절대적으로 간여하는 성령의 결정적인 역사를 강조하였다. 프린스턴 신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마크 놀 교수에 의하면, 프린스턴 신학의 유산과 전통 속에는 균형 잡힌 성령론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칼빈의 성령론은 견고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리챠드 개핀 교수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날의 성령 역사는 요엘서 2장 8절의 성취로서 이해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행사되는 날로 보아야 하며,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단 한번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그 효력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성경이 종결된 이후로 예언적 성격의 방언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퍼거슨 교수는 1995년 자신의 ‘구원론’ 강의 노트를 발전시켜서 「성령」에 관한 종합적인 교리를 체계화 하면서 많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주장들이 지닌 모순점들에 대하여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다시 해답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칼빈에서 퍼거슨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자들이 내놓은 일련의 성령에 관한 연구들은 개혁주의 교회와 장로교회가 결코 성령에 관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입증하는 신학적인 증거들이다. 성령에 관하여 가장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보편적 진리들을 추구하였고, 놀랍도록 풍성한 답변들을 찾아 놓았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개혁주의 신학에 성령이 빠져버렸다는 잘못된 편견은 버려야 한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연구 업적들을 자신만 모르면서 마냥 남들이 하는 ‘험담’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연구가 우리가 지금 궁금하게 생각하는 모든 문제점들을 다 해결해 주었다고 볼 수 없다. 아직도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더욱 궁금해 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성령의 존재와 사역을 놓쳐 버리고, 좀 더 특수한 것,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강력한 것을 직접 체험하려 하면서 성경 말씀을 저버리는 성령운동은 혼돈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칼빈으로부터 그리고 그 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남긴 성령에 대한 강조들 가운데서 우리가 얻어야할 지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혜도 필요하고, 성령의 권능과 능력에 사로잡혀서 다시금 소망을 새롭게 하는 시기에 처해 있으므로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롬 16:13-17).

우리는 지금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기독교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시도록 자신의 욕망을 내어 버리고 제물로 드려지는 삶이라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믿음 안에서 성화의 삶을 매일 살아가는 것은 평범한 생존이 아니라,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소망에 넘치는 성령 충만한 자의 자화상이다.

결론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개신교들의 운동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수직적인 성직주의를 깨트리고 성경적 종교개혁의 종합적인 완성자로서 칼빈의 공헌을 생각할 때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찬사가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성경에서 터득하여 제시한 지침들로 인하여서 개신교 전체가 도움을 얻을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사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명예만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칭호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남겼다. 적어도 칼빈이 가졌던 다음과 같은 신앙인의 태도는 성령의 신학자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아야만 하지 않는가? 칼빈이 자신을 쫒아냈다가 다시 부른 제네바 교회로 돌아가면서, 주변에서 강권하는 분들에게 보낸 심경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비장했었다.

“나는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에게 바쳐진 희생 제물처럼, 나는 나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나이다 ....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뜻과 나의 애틋한 감정들을 바치오며, 복종시킬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뜻을 버려야만 할 때에는 언제든지,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실 것을 소망하면서, 나 자신을 복종시키고자 합니다.”

칼빈과 개혁주의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에 철저히 의존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칼빈은 혼돈에 빠져있던 제네바 교회를 철저한 신앙공동체로 바꿔놓았다. 그야말로 일생에 걸친 그의 헌신적인 희생과 투쟁의 산물이었다. 칼빈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갖고 말씀을 선포하였다. 성경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 갖게 되었다. 무모한 자기 과시나 소영웅주의에 빠진 자만심의 선포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에서 체험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스리는 수많은 대적자들과 맞서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만 했었다. 그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었을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약해질 수 있고, 조롱과 비난에 부딪혀서 인간적으로는 비참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그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깊은 연구와 경건한 생활의 근거는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위로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에 확신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감사하도록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한국교회도 다시 한번 신뢰를 받고 활발하게 살아나려면, 칼빈에게 주어졌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모두가 체험하여서 성령의 사람으로 확고하게 일어나야 한다. 모두 성도들이 확실한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아름다운 열매들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영생의 맛을 보는 내용이다. 살아있는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창조적인 비전을 안고 나아가려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야 한다. 사람의 감정이나 흥분이나 종교적 체험은 일시적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나 목표들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지고 만다.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어야만 거룩한 사랑이 역사하게 된다.

 

 

기독교학술원 발표(2015.2.) 글

 

데오스앤로고스 thelogos66@gmail.com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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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무심코 사용하는 일본말

    한국인이 무심코 사용하는 일본말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흔히 쓰는 말들 중에는 순우리말이 있는데도 일본말을 쓰는 것들이 있는데요. “의미만 전달되면 됐지”라는 잘못된 생각이 요즘 말하는 “한글파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요즘 학생들...
    Date2019.11.21 Bydschoiword Reply1 Views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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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들이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뉴스앤조이 글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들이 과연 어떤 것이 있는지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더구나 그것들이 기독교 세계관과 어떤 관계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일은 더 어...
    Date2019.11.21 Bydschoiword Reply0 Views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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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공동체, 입증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경제공동체, 입증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어쩌다 592억 원이 된 박근혜 뇌물 <동아일보> donga.com [송평인 칼럼] 송평인 논설위원 입력 2017-04-19 03:00 수정 2017-04-19 05:04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어디는 뇌물, 어디는 강요 검찰도 확신 없이 특검 따...
    Date2017.04.19 Bydschoiword Reply0 Views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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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운동의 혼란/ 김효성

    은사운동의 혼란 김효성 목사 2013년 2월 23일 내용 목차 은사운동의 기원과 특징과 세력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하여 은사운동에 대한 비평 서론 어떤 이는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에 성령이 역사하심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하...
    Date2017.03.25 Bydschoiword Reply0 Views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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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헌재 고발장, 우종창

    역사자료 고 발 장 고 발 인 우종창(○○○○○○-○○○○○○○) 서울 강북구 솔매로 ○○-○, ○○○호 연락처 : 010-5307-5472 피고발인 1. 이정미 : 헌법재판소 재판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15(재동 83) 헌법재판소 2. 김이수 : 헌법재판소 재판관. 주소는 위와 같음 3. 이...
    Date2017.03.14 Bydschoiword Reply0 Views84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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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를 가장한 좌익의 선전선동

    대한민국 부정…진보를 가장한 좌익의 선전선동 자유를 깨달은 이들의 절박함이 대한민국을 진보하게 해 <미디어펜>(승인 2017-03-12 09:20:55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진보진영은 진보적인가? 첫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한번 형성된 첫인상은 그...
    Date2017.03.12 Bydschoiword Reply0 Views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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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중국 공산당 간부가 탄핵 정국에 대하여 한 말이다

    한 중국 공산당 간부가 탄핵 정국에 대하여 한 말이다 <대한신보> 2017.3.11. ​1. “권력자는 선전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끝난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언론을 장악하기는커녕 적대적(敵對的) 관계를 유지하다가 종국엔 언론에 장악된 것을 평한 말이다. 2...
    Date2017.03.12 Bydschoiword Reply0 Views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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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평우, 탄핵을 탄핵한다

    오늘부터 우리는 제2건국의 행군을 시작합시다!(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8709) 김평우 /전 대한변협 회장,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 변호사 1.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8인 재판관 전원이 국회의 탄핵소추를 인용하여 박근혜 대통령님...
    Date2017.03.12 Bydschoiword Reply0 Views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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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의 책임-이념의 결핍

    보수조직의 붕괴와 박근혜의 책임 - 이념의 결핍/ 조갑제 (조갑제닷컴의 글) 조직붕괴 어느 중국 공산당 간부가 한국의 탄핵 정국에 대하여 한 말이다. 1. “권력자는 선전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끝난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언론을 장악하기는커녕 적대...
    Date2017.03.12 Bydschoiword Reply0 Views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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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어찌 이런 것을 헌재의 판결문이라 할 수 있나?

    조갑제, 어찌 이런 것을 헌재의 판결문이라 할 수 있나? 사랑하는 법치 애국 시민 여러분, 1. 여러분, 어제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진 것은 우리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입니다. 여러분, 어제 많이 긴장하고, 놀라고, 괴로우셨지요? 특히 저에게는 박근혜 ...
    Date2017.03.11 Bydschoiword Reply0 Views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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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판결문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판결문 지금부터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선고에 앞서 이 사건의 진행경과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지난 90여일 동안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Date2017.03.11 Bydschoiword Reply0 Views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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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이 김철홍 교수다

    이 분이 김철홍 교수다 “사상적 전향에 대한 그늘”에 대한 비판과 공산주의 이론의 그늘 속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학에 대한 나의 입장 김 철 홍 며칠 전 전주(全州)에 있는 본 교단 소속 한일장신대의 신약학 교수인 차정식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
    Date2017.02.11 Bydschoiword Reply0 Views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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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말하는 방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 <신학정론> 글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방언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늘 부담스럽다. 한국교회에서 방언에 대한 논쟁은 쉽게 과열이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이 방언에 대한 ...
    Date2017.02.08 Bydschoiword Reply0 Views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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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비결 15가지/ 유홍준

    글쓰기 비결 15가지/ 유홍준 유홍준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0주년 기념 강연 – ‘문화유산을 보는 눈과 나의 글쓰기’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중앙선데이> 정재숙 문화전문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1. 주제를 장악하라. 제목만...
    Date2017.01.29 Bydschoiword Reply0 Views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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