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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독법률가회(CLF)(성경적인 법학연구, 대안적인 법률가의 삶, 법을 통한 섬김을 모토로 하는 모임)


십자가의 인류: 미메시스 이론과 르네 지라르/ 정일권


8월 15일 오후에 열렸던 연구위원회 독서공방 모임에서는, 정일권 선생님이 쓰신 '십자가의 인류학: 미메시스 이론과 르네 지라르'라는 도서를 읽었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속죄론 이론에 대한 신학적인 수용을 고려한 멋진 책이었습니다. 책에 대한 요약문을 첨부합니다.

3장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변증

 

희생양 메커니즘의 치유와 극복

 

-지라르는 인류 공동체의 삶의 기초들에 대한 그의 문학이론적이고, 문화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그리고 신학적인 역구, 잘못된 초월관계들의 역동성에 대한 연구, 폭력으로 기울어지는 인류의 경향성의 기원들에 대한 폭로, 진정하고 비판적이고 구원하는 종교적 능력들을 통한 폭력의 통제와 극복에 대한 연구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복음서는 신화의 죽음이다

 

급진적인 폭력비판으로서의 십자가와 평화윤리

 

-가장 비극적이고 현실적인 관계이론이자 갈등이론인 지라르의 이론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는 평화이론이다.

 

-십자가의 폭력은 역설적이게도 창세 이후로 은폐되어온 문명의 폭력을 가시화시키고 주제화시키는 하나님의 아픔이요 슬픔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 가해진 폭력이 예수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기에,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폭력에 대해 매우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감수성을 가진다. 기독교의 중심의 십자가의 폭력이 높게 가시화되고 주제화되기에, 기독교는 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급진적인 폭력비판을 문명 속에서 지속해 왔다. 기독교가 범한 폭력과 야만도 존재하지만, 많은 희생자들, 약자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교한 사법제도와 사회체제를 점차 만들어왔다.

 

-기독교적 스토리텔링으로부터 희생양에 대한 근심의 문화가 탄생했고, 이 희생양에 대한 성경적 근심과 관심은 기독교적 세계의 한계를 추월해서 “도덕적인 공공재산”이 되었다. by 후버

 

-기독교적 가치로부터 파생된 이 도덕적인 공공재산은 여전히 독일에서도 “희생양을 통한 자기구원”이라는 원시적 형태와 경쟁하고 있다. (loser, opfer라는 통상적인 욕설에 대한 비판) by 후버

-문화의 초석적 폭력은 구약 예언자들에 의해서 비판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폭력적 운명 속에서 그 최종적인 급진성으로 폭로되고 또 단 한번의 영원한 방식으로 극복되었다.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

 

-박해의 문서로서 신화는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 복음서는 이러한 박해의 문서로서의 신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화로 읽힌다. 이는 근대가 제시한 독법이다. 그러나 지라르는 복음서는 신화와 문자적인 정반대로서 계몽의 문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음서의 영향으로 근대가 동텄다.

 

-빛인 복음서가 아직도 어두운 신화를 ‘해독’한다. 세계의 신화들이 복음서를 해석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복음서가 신화들을 해석하는 방법을 계시한다.

 

-세계의 신화들은 결국 희생양 메커니즘의 미메시스적인 전염에 굴복한 공동체의 목소리다. 신화는 희생양에 대한 만장일치적인 살해 때문에 평화롭고 카타르시스적인 결론으로 끝난다. 하지만 복음서는 신화가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그것을 폭로하고 계시한다.

 

신화와 그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계몽

 

-지라르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스칸달론의 의미 그대로 부딪히면 넘어지는 돌과 같았다. 지라르는 포스트모던적 시대정신 속에서 많은 경우 추방되고 배제되었던 유대-기독교적 텍스트를 다시금 심도 깊게 논의해 자신의 미메시스 이론 안에 포용했기 때문이다.

 

-지라르의 이론은 바로 이 이론이 겪고 있는 폭력적인 폄하를 설명하고 또한,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도발적이다.

 

-창세 이후로 은폐되어 온 희생양 메커니즘에 관한 인류학적 진실이 밝혀지려면 십자가 꼭 필요. 그것은 성령의 선물. 십자가만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림으로써 희생양의 무고함을 드러낼 수 있음. >다른 신화들과는 구분되는 십자가만의 특질, 참된 초월성!

 

지라르의 회심

-지라르의 연구가 지라르를 기독교로 개종시킴. 기독교가 여전히 가장 생산성 높은 인문학이라는 것을 지라르는 입증하고 있음.

 

-유대교의 예언자들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사회적 질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희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기 시작함.

 

-지라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희생제의적”해석은 “가장 크고 역설적인 오해”로서 비판받고 노출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 역설적인 오해는 동시에 필요한 어떤 것으로, 곧 자신의 폭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류의 “급진적인 무능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지라르의 십자가의 인류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단 한 번의 영원한 자기희생의 역설과 승리를 동시에 말하고, 중세적 희생제의적 기독교를 비판한다.

 

기독교 복음의 르네상스

 

-니체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는 과거 역사의 중심이지만, 도덕성에 대한 그의 다스림은 이제 신에 대한 살해로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지라르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는 인류 문화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계시하는 ‘죄 없으신 희생양’이다.

 

-현대세계의 모든 과잉들은 기독교적 진리의 왜곡들이라고 지라르는 말한다.

 

-지라르는 상대주의의 독재를 비판하고 기독교의 르네상스를 꿈꾼다.

 

미메시스 이론과 종교적 상대주의

 

-유대-기독교적 전통과 신화의 차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희생양은 죄가 없고, 집단적 폭력이 유죄로 선고된다. 신화에서는 희생제사를 집행하는 공동체와 집단은 항상 죄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니체는 신화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차이를 바로 파악했지만, 그것을 도덕의 문제로만 파악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이는 단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라고 말한다. 유대-기독교적 유산에는 도덕과 진리의 일치가 존재하지만, 니체와 많은 현대사상가들에게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군중현상의 기만적 허상이 신화인데, 신화가 희생양과 공동체 사이의 실제 관계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를 속이고 있다. 하지만 유대-기독교적 텍스트는 이 왜곡된 관계를 교정함으로써 진리를 말한다. 유대-기독교적 텍스트들은 신화들이 은폐하는 진리를 폭로한다. 그래서 희생자들에 대한 변호는 단지 불명확한 도덕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들의 진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유대-기독교적 유산은 집단적 폭력행위를 노출하고 고발하기에 복음서에서 강조된 것처럼 ‘분열’을 말한다. 진리의 폭발은 폭력적 만장일치의 기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적 조화를 파괴한다.

 

-니체는 이 희생자들에 대한 우선적 변호를 하는 기독교 도덕을 노예도덕으로 평가함으로 열등성에 대한 증거로 주장했지만, 지라르는 희생양에 대한 성경적 근심과 관심을 우위성에 대한 증거로 이해한다. 지라르는 유대-기독교적 유산이 ‘인류의 근본적인 유혹’에 저항한 것으로 본다.

 

-지라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통적인 희생제의 개념성으로 이해하면, 기독교가 다시금 ‘원시적 종교의 형태’에 동화되어버릴 위험 때문에 지라르는 오랫동안 이 희생제사 개념을 거부했다.

 

신화의 수수께끼와 십자가의 승리

 

-‘유대-기독교적 탈신성화’는 ‘신성화된 희생양들의 원시주의’를 극복한다. ‘수 없이 존재하는 신성화된 희생양들 중 또 하나의 희생양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바로 그 마지막 희생양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앞의 수많은 희생양들을 탈신성화시키며 또한, 그 이후 희생양들의 신성화를 막는다.

 

-원시적인 신들은 희생양들의 효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산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설적이게도 그 희생양 메커니즘의 무효과로부터 그리고 거짓 신들의 파괴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제사라는 역설은 십자가의 역설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지라르의 비판적 이해는 종교개혁적이고 계몽주의적이다.

 

-신성화된 희생양들과 달리 성경의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희생자들과 연대하는 비폭력적인 희생자의 하나님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성경을 너무 쉽게 동일시하는 현대적 흐름을 비판하기 위해 원시적 희생논리와 기독교적 헌신을 같은 개념으로 표현하기를 거부했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희생제사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바울도 희생제사 대신 ‘사랑의 행위’ 혹은 ‘은혜의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십자가의 해석학이 성스러운 폭력을 폭로한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지라르의 인류학적 독법은 십자가의 역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승리를 보게 한다.

 

-지라르에 의하면 유일신론의 신은 희생양 메커니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에 반해 다신교는 수많은 희생양의 초석에서 발생한다. 유대교에서 신은 더는 희생양이 아니고 희생양도 더는 신격화되지 않는다.

 

-지라르는 인류 사회는 ‘박해자들의 신’에 대한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숭배의 조건 아래서 발전되었다고 보는데, 지라르는 이러한 박해자들의 신을 참된 의미에서 신적이라기보다는 악마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십자가의 해석학’이 ‘성스러운 폭력’을 폭로하고 전복시키고 치유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의 주요한 효과는 성스러운 폭력에 대한 폭로다.

 

-하나의 희생양이 될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은 이를 통해 디오니소스 희생제의의 미메시스적인 작용을 비판했다.

 

신화에 대한 복음적인 전복

 

-지라르는 눅11:50의 말씀을 프로이트의 최초 살해와 자신의 초석적 살해 개념과 연결한다. 인류의 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류 문화와 살해 사이의 결탁이 존재하는데, 예수에 의하면, 이것은 그가 살던 시대에까지 전해 내려와서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모든 인류 문화는 진리에 대한 폭력적인 매장으로부터 시작되고 또 지속되고 있다. 아벨의 살해는 이러한 ‘모든 신화들과 제의들의 발생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지라르는 ‘회칠한 무덤’에 관하여 무덤 안에서 썩어가는 시체와 무덤 밖의 아름다운 구조는 최초의 희생양의 관계에서 인류 문화의 전체 과정과 닮아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희생양 만들기의 최초의 상징적 변형으로서의 무덤’에 대하여 말한다.

 

-성경의 계시는 ‘인류 문화의 폭력적 진실에 대한 폭력적 억압’을 계시한다.

 

바르트와 지라르: 진리와 은총의 승리

-지라르는 신학과 윤리학을 그 본질적인 일치성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바르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참된 하나님의 본질이 나타났다고 본다.

 

-바르트의 대속이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지라르의 문학적이고 인류학적 분석에 대한 하나의 교의학적 버전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희생양과 성스러움과 폭력의 관계에 대한 지라르의 이론이 가지는 많은 실제적인 결과들을 대속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라르와 바르트 모두에게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는 하나님, 곧 사랑하고 비폭력적인 하나님이다.

 

-다만 지라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님은 만족하기 위해서 희생제사가 필요한 폭력적인 하나님으로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트의 교의학에서는 하나님은 대속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다.

 

-지라르는 기독교에 대한 희생제의적이고 이교적인 해석에 대한 거부와 십자가의 승리에 대한 강조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제사로 보는 것에 대해 유보적이었지만, 이후에는 십자가의 역설이라는 의미에서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제사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지라르는 인문학자로서 인류학적이고 인문학적 지평에서 사유하고 저술하기에 방법론적인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지평이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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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희생양>를 읽고 쓴  글/ 글쓴이 미상

 


제가 이해한 바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지라르에 의하면 세계질서는 모두 희생양메커니즘으로부터 나옵니다. 인간은 모방 욕구가 있어서 서로 모방 경쟁으로 인한 갈등에 빠집니다. 갈등은 폭력을 유발하는데, 인간 사회는 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범상치 않은 구성원에게 온갖 나쁜 것들을 전가하여 폭력을 배설합니다. 폭력의 배출구가 되는 이 사회적 왕따를 전문용어로 희생양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희생양을 죽임으로써 모방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소하고 다시 질서를 구축합니다. 이 새로운 질서가 바로 문화, 철학, 법, 언어, 신화,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2. 희생양 메커니즘은 '희생제의'라는 형식을 통해 작동합니다. 희생제의의 과정은 이러합니다. 첫째, 희생양을 만들고, 둘째, 희생양에게 온갖 범죄를 허용합니다.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구성원 간의 '차이'가 희생양을 통해 '무차별화' 됩니다. 사회에서 갈등이 한계치를 넘을 경우 발생하게되는 무차별적인 폭력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도록 희생양이 그 폭력적 과정을 스스로 재현합니다.(모방위기의 재현) 셋째, 사회는 범죄를 저지른 희생양을 죽입니다. 이 범죄는 희생양이 저지른 것인 동시에 애초에 사회 구성원의 갈등 속에 내재된 욕망의 표출입니다. 즉 구성원의 죄를 희생양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넷째, 희생양을 통해 욕망을 배설한 후 구성원들은 다시 질서를 구축합니다. 희생양이 저지른 범죄는 질서를 구축하는 규범이 됩니다. 희생양에게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차이의 붕괴는 다시 사회적 차이들을 발생시킵니다. 다섯째, 희생양에게 죄를 전가한 후 나머지 구성원들은 자기 안에 있는 동일한 죄를 은폐합니다. '왕따'를 조장하는 이들은 늘 왕따의 부덕함에 근거하여 '나는 안 그렇다'는 점을 주장하려 합니다. 그러나 희생양이 계속 희생양으로 남을 경우, 구성원들은 희생양이 저지른 죄와 유사한 것들을 자기 내면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전에 죽였던 희생양을 자기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둔갑시킵니다. 철저한 예외적 존재, 곧 신으로 만듭니다. 역설적이게도 희생양은 신이 됩니다. 모든 고대 신화의 주인공은 따라서 한때 희생양이었습니다.


3. 희생양만들기는 인간 사회가 갈등을 조절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희생양을 만드는 인간들은 자기 안에 있는 모방 욕망과 질투와 죄성을 은폐하려하므로, 희생양을 신으로 둔갑시키는 과정 또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인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구성원들이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희생양 만들기'라는 표현 대신 '희생양 메커니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따라서 신화의 주인공들은 '은폐된' 희생양들입니다. 지라르는 이를 "태초 이래로 감춰져 온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4. 그러던 중 인류 역사에 이제껏 없던 새로운 종류의 희생양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을 유지, 강화시키는 희생양이 아니라 그 실체를 폭로하는 희생양입니다. 다른 희생양들은 무차별적 죄를 스스로 범하므로 나머지 구성원들의 죄를 은폐시켜줍니다. 예수는 무죄한 희생양으로 나머지 구성원들의 죄를 폭로합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희생양들은 다수 구성원들에 의해 신성화됩니다. 세계질서를 세우는 '초석'이 됩니다.(초석적 희생양) 예수는 다수에 의해 죽임 당한 후 부활하여 소수 제자들에 의해 신성화됩니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위에 건설된 세계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희생양들은 다수의 폭력을 은폐함으로 결국 다수의 권리를 세웁니다. 예수는 다수의 폭력에 희생당한 세상의 모든 희생양들 편에 섭니다. 희생양의 권리를 대변합니다. 지라르는 초석적 희생양 위에 건설된 인류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종의 '스캔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지라르는 '은폐된 희생양'인 신들이 지니는 속성을 '성스러운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거룩한 것'으로 구별합니다. 성스러움은 폭력의 결과입니다. 거룩함은 비폭력의 결과입니다. 세상이 희생양에게 기대하는 범죄를 끝까지 저지르지 않고 아무 저항 없이 처형당하므로 오히려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5. 기독교 이후 세계질서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이 폭로되어 더 이상 전과 같이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양면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약자의 권리와 개인의 존엄성이 부각되어 민주주의가 도래합니다. 모방갈등을 은폐된 폭력이 아닌 창조적 활동으로 해소하게 되면서 산업과 과학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전근대적 신화에 기초한 종교권력과 왕권들이 탈 신성화되면서 계몽사상이 등장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방 갈등을 해소할 안전한 출구를 잃게 되어 세계는 '모방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희생양에게 제한적으로 용인되었던 폭력이 가족에게, 친구에게, 유명인에게, 정치인에게, 정부에게, 다른 나라에 전방위적으로 방사됩니다. 사회적 왕따, 연예인 신상털기, 테러리즘, 소요, 정치비판이 확산됩니다.


6. 니체를 필두로 한 현대 철학은 '모방 위기'의 대안을 기독교 이전 문화에서 찾습니다. 니체는 개인의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독교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고 비난하면서 고대 신화 세계에서 평안을 찾고자 합니다. 모든 다양성을 해체하는 불교의 '무'사상을 군주도덕이라 치켜세웁니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다시금 미화하기 시작합니다. 군중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디오니소스의 가치를 재발견합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보이는 해체 철학은 사실 가장 복고적인 철학입니다. 그 결과는 다수를 위한 소수 희생의 정당화, 개인성의 말살, 곧 파시즘으로 나타납니다.


7. 일면 고상해보이는 불교 역시 희생제의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디오니소스와 마찬가지로 희생양이었습니다. 다른 문명과 다르게 인도문명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희생제의를 반복하기보다, 그것을 '출가자'라는 특수 집단에게 전문화시켰습니다. 출가자는 자의적, 타의적으로 희생양이 되어 '재가자'의 죄를 전가 받고, 스스로 죽음을 체현합니다. 재가자는 죽음을 완성한 출가자를 신성화합니다. 희생양과 군중의 관계가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속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8. 출가자는 희생제의를 내면화합니다. 첫째, 스스로 희생양으로 구별됩니다. 출가자들은 출가 전에 미리 장례를 치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자가 됩니다. 둘째, 희생양에게 요구되는 범죄들을 스스로 저지릅니다. 초기 불교 문헌에는 출가한 요기들의 온갖 무차별적 범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단 성교, 살인, 신분을 초월한 성행위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이후 붓다들과 보살들의 '파계' 행위로 이어집니다. 붓다들은 파계를 위해 창녀들과 통음난무를 합니다. 보살이 여성의 모습을 한 이유는 한때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파계를 깨달음에 이르는 필수 과정으로 여깁니다. 창녀촌을 자주 드나든 파계승 원효가 좋은 예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선문답이라는 언어 파괴를 통해 세계질서를 부정합니다. 여기에는 자주 물리적 폭력이 동원됩니다. 초기 전기문에서 석가는 전생에 브라만 살해, 붓다 살해의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묘사됩니다. 셋째, 범죄를 저지른 후 처형당하는 희생양의 죽음은 불교에서 '명상'으로 내면화됩니다. 명상의 기원은 힌두교의 '불제사'입니다. 명상은 화형 당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명상의 주요 수단은 내면의 열(타파스)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내면의 열은 두개골을 파열시킵니다. 남방불교의 불상은 양초 모양인데, 출가승들은 스스로 양초가 되어 자신의 몸을 태웁니다. 현대의 명상은 20세기의 산물로 폭력적 전통이 많이 희석된 것입니다. 넷째, 죽음 이후 신성화되는 희생양 처럼, 출가승들의 유해는 재가자들에게 신성화됩니다. 사리는 복을 가져다주는 보물로 여겨집니다. 왕과 상인으로 대표되는 재가자들은 탑을 쌓고 사리를 경쟁적으로 분배합니다. 출가자들의 죽음에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가 발생합니다.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복전(복이 생산되는 땅)'이 됩니다. 재가자는 출가자에게 액운과 죄와 독을 전가하고 출가자들은 재가자에게 복(공덕)을 돌려줍니다. 희생양 메커니즘과 그 구조가 일치합니다. 희생양과 나머지 군중들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분리되듯, 출가자와 재가자 역시 분리됩니다. 파계와 명상은 본래 희생양인 출가자들에게만 허용된 것입니다.


9. 불교철학 역시 희생제의적 기원을 갖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 '무아' 등의 반논리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은 출가자들의 애매모호한 실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출가자들은 살았으나 죽은자입니다. 살아가면서 죽음을 미리 겪는 자입니다. 세상만물이 공한 것은 출가자들의 실존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고통인 것은 출가자들에게 그런 관점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출가자들은 세상에 대한 염증을 느끼도록 훈련 받는 자들입니다. 무덤가에서 명상하고 죽은 자의 옷을 입으며 인생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그들의 수행법이었습니다. 이타적인 보살행 역시 본래 출가자들만의 가치였습니다. 출가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재가자들을 이롭게 하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산상수훈이나 십계명에서 요구하는 이타성처럼 사회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희생제의적 차원에서의 이타성입니다. 보살들에겐 이타적인 행위뿐 아니라 범죄행위도 요구됩니다. 파계(계율 파괴)는 깨달음에 있어서 본질적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님과는 달리 출가자들은 일반인에게 모델이 되지 않습니다. 출가자의 통음난무, 폭력적 선문답, 자기 파괴적 명상은 재가자들이 따라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입니다. 보살행을 재가자들이 따라해야 할 모델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 사회윤리를 모방한 현대 참여불교의 관점입니다. 본래 출가자는 '반모델'이었습니다. 이는 고대 신화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집니다. 희생양인 그들은 사회에서 추방당하고 처형당한 범죄자들로 이후 신성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 사회에서 반모델로 간주됩니다. 불교의 반논리, 반질서는 출가자들만의 사유입니다. 희생양처럼 그들은 사회질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생산하는 기능을 합니다. 카르마와 카스트는 불교가 해체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유지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대상입니다. 불교 교리에서 카르마와 윤회는 필수적입니다.

 
10.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교를 고상하고 철학적인 종교로 오해하고 있을까요? 18세기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연구된 '서구화된 불교'가 동양에 역수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구의 현대 철학자들은 기독교가 초래한 '모방위기'를 극복하고자 고대 신화로 도피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안을 불교에서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동양에 대한 낭만적 관점(오리엔탈리즘)이 덧입혀져 불교를 낭만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학적 뿌리에 대한 관심을 도외시한 채 이미 철학화, 학문화 된 기독교와 비교하기에 적합한 불교 문헌들만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연구한 것입니다. 동양불교계는 서구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윤색된 불교를 역수입했습니다. 이를 '자기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합니다.  특히 개신교를 모방함으로써 불교의 원시적 색체를 지우려 하였습니다. 개신교를 모방한 불교를 '프로테스탄트 불교'라고 하며,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는 불교는 사실 서구화된 불교, 곧 '프로테스탄트 불교'입니다. 실제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불교와 비교할 때 다분히 철학화, 미학화, 낭만화된 불교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설법할 때 인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렸는데, 언젠가부터 연사가 강단에서 얼굴표정과 제스쳐를 활용하여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장례 이외에는 어떤 예식도 집도하지 않았는데, 인생 과정의 다양한 예식을 집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살행의 이타주의만을 떼어내서 기독교의 산상수훈과 비교하며, 심지어 보살을 예수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교토학파는 하이데거 철학을 수용하여 불교를 서구철학화했습니다. '공'을 양자역학과 비교하는 시도도 있습니다. 모든 문헌은 당대적 맥락에서 형상되었음에도, 2500년 역사를 건너 뛰어서 갑자기 현대적 배경에서 불교를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희생제의적, 기복적 전통은 외면하거나, '타락설'(본래 불교는 안 그랬는데 요새 변질되었다)로 도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불교는 희생제의적이고 기복적입니다. 아직도 그런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무당과 보살이 동일시되기도 하고, 경전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주문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자기 몸을 불태우는 소신공양, 미라화 된 붓다 숭배 등의 희생제의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리 숭배는 재가불교의 타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기 불교에서 출가자들이 먼저 사리를 숭배했고 또 재가자들에게 이를 요구했습니다. 소신공양은 붓다의 사리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출가자들의 '무'의 세계는 재가자들의 기복적 세계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세계를 해체하는 현대적 해체철학도 아니고, 카스트를 부정하는 사회개혁론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질서를 재생산하는 희생제의적 차원의 '무'인 것입니다. 불교의 근대화는 아직도 남아있는 희생제의적 흔적에 대한 자기 계몽을 먼저 이룬 후에야 가능합니다. 자기 계몽을 건너 뛰고 서양의 현대적 배경을 뜬금없이 가져오는 '고속 근대화'는 학문적 정식성을 훼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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