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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대학교의 일부


라드 신앙운동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하루아침에 발생하지 않는다. 여러 요소, 요인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갈등을 야기하고, 운동을 확산시키다가 어느 시점에서 주목받는 사건으로 발발한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개혁운동은 유럽사에서 정신과 문화를 바꿔놓은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다. 영국종교개혁은 영국의 종교, 사상, 문화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추종하는 위대한 이단자들의 무리인 롤라드인들(Lollards)의 신앙운동이 있었다.

 

영국판 가난한 설교자들인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신학적 주지들을 도시와 농촌으로 확산시켰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청빈하게 살면서 교회의 부와 사치를 비판했다. 성자숭배, 성지순례의 유효성, 고백성사, 화체설을 거부했다. 로마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서 생활방식을 배워야한다고 했다. 목숨을 건 성경 영어번역과 보급에 정신적 힘을 제공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교회가 로마교회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헨리 8세 치하의 영국교회의 독립에 필요한 정신적, 이론적 근거였다. 롤라드인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로마교회의 교권주의 전통과 미신적 관습에 항거하는 교회개혁 정신을 북돋았다. 성경의 권위를 교황의 권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영국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 여러 지역에 많은 롤라드인들의 후손들이 퍼져 있었다.

 

영국왕 헨리 4세는 롤라드인들에게 활동 금지령을 내렸다. 헨리 5세는 그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많은 롤라드인들이 교회의 법정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았다.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재위기간에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로 정죄당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반성직주의 성격을 지니고 비밀리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 영국교회의 풍경

 

14세기의 영국사회는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다. 첫째, 예비 성직록 수임자 조례(the acts of provisors)로 말미암아 교황권에 대한 완강한 저항이 절정에 달했다. 둘째, 영국교회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신학자 존 위클리프의 등장과 함께 신학 주제들에 대한 사고(思考) 발상의 전환에 직면했다.

 

영국은 1377년에 시작된 100년 전쟁(영국 대 프랑스)1348년에 참혹한 피해를 안겨준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영어가 공용어로 공식 채택되고, 의회의 권한이 증대되면서 부유한 시민 계층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나뉘어졌다.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고, 농노계층의 권익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민담, , 소책자, 농민봉기, 폭동으로 표출되었다.

 

대 전염병은 영국사회의 구조를 바꾸어놓았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소규모 자영농민들의 많은 땅들이 젠트리 계층의 지주들에게 넘어갔다.1 인구가 줄어들자 양들과 가축들이 밭을 헤집고 다니며 곡식을 훼손해도 몰아낼 사람이 없었다. 농노들은 사회 불안을 틈타 노예 신분의 멍에를 벗을 기회를 찾았다. 그들은 유랑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전쟁 비용 때문에 세금이 인상되었고, 민중의 불만이 조직적인 반란 형태로 나타났다. 봉건시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었다.

 

그 무렵, 시인 윌리엄 랭런드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갈구하는 정신을 마음을 격동시키는 운율로 표출했다. 랭런드의 알레고리 식 이야기 시 농부의 불평은 인간의 원초적 권리에 호소하면서 들불처럼 광범위하게 퍼졌다.

 

아담이 밭고랑 파고 하와가 실을 짤 때,

그때 누가 귀족이었던가?2

 

랭런드는 평등한 인간 사회를 추구한다. 현실세계의 인간의 속성을 대변하는 다양한 도덕적 추상적 개념들과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대의 부패한 종교와 사회 그리고 인간성을 비판한다.

 

귀족이라고 불리는 저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어야 합니까? 무슨 근거로 저들이 우리를 봉건 신하로 부리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같은 부모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가 당신의 아랫사람일지라도 하늘에서는 당신보다 더 귀한 사람이 되어 큰 복을 받을지 누가 압니까?

 

1381년에 일어난 민중봉기 무리는 런던까지 진격했다. 일부 그룹은 런던탑을 장악하고 대감독 서드베리를 처형했다. 지탄의 대상이 된 처형제 폐지에 감독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기에 가담한 자들은 수도원들을 약탈하고, 수도사들을 학대했다. 민중봉기는 사회적 불평등 시정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강렬한 의사표시였다. 대중은 성직자의 수요를 충당하는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제외한 나머지는 교구민들에게 분배해야 하고, 영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한 명만 두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회는 영국 영토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탁발수도운동은 사회봉사와 복음전도라는 선한 동기로 출발했다. 이 무렵에 이르러 게으르고 일하기 싫은 자들의 자유와 태만을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교회의 부패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탁발수도사들의 구걸 행위에 불평을 쏟아냈다. 어느 감독은 흑사병으로 죽은 성직자들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교회법규에 구애를 받지 않고 60명의 젊은이들을 성직자로 임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생활필수품 가격이 치솟은 탓으로 사제들은 턱없이 부족한 급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들의 불만을 의식하면서도 적절한 처방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하위계급 성직자들의 탐욕을 정죄했다. 현세적이고 귀족적인 고위성직자들은 대부분 몰염치한 겸직주의자들이었다. 세속직과 성직을 겸하고 있었다. 여러 교회들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대다수 하위성직자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성직자 신분이었지만 왕궁과 젠트리들의 저택들에서 세속적인 일과 허드렛일을 해 주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한 랭런드의 묘사는 아주 생생하다.

 

본당 신부와 소교구 사제가 주교를 찾아가

역병이 돈 뒤로 소교구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부디 면허증을 주어 런던에 가서 살게 해 주면

거기서 노래(구걸)하여 성직을 구입하여 살아보겠다고 간청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으니까.3

 

각 교구는 자체 감옥을 소유했다. 감독은 말을 잘 듣지 않는 하위 성직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어 고해를 하게하고 심한 벌을 주었다. 그러나 고위성직자들은 풍족하게 살았다. 개인 장원(莊園)50개나 소유한 감독도 있었다. 규모가 큰 장원에는 거실과 예배당이 딸린 공식 관저들이 있었다. 고위성직자는 자신의 장원들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공식 업무를 수행했다. 성직 지원자들을 면접하고, 장원 청지기들에게서 회계보고를 받았다. 이러한 짓을 하는 고위 사제 가운데는 막대한 기부금을 받아 그 돈으로 옥스퍼드에 대학을 세운 자도 있었다. 하위성직자 다수는 농노계층 출신이었다. 성직을 임명받는 날이 농노 신분, 농노 계급에서 자유를 얻는 해방의 날이었다.

 

어느 시대나 성직자의 부패와 범죄에 대한 지적에는 과장이 심하다. 일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이 무렵 영국 성직자들이 누린 혜택은 예사롭지 않았다. 불공평한 혜택은 날이 갈수록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396년에는 면죄부가 남발되었다. 교회는 요크대교회당 건축과 교량건설과 도로개설과 그 밖의 공공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이 무렵, 성직자 독신주의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가정을 가진 사제들은 교회가 축척해 놓은 돈을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사용하여 비난을 받았다. 세인트데이비즈의 감독 드 라 베르는 사제들에게 첩을 두고 살도록 허용해 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받았다. 부도덕과 무위도식이 성직자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다.

 

13세기의 탁발수도사들은 뜨거운 향학열과 복음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4세기의 탁발수도사들은 그들에게 남은 것이 자기만족과 나태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옥스퍼드 어느 칼리지의 교수인 아르마의 피츠랄프는 탁발수도사들의 기강해이와 미개한 행동을 지탄했다. 프랜시스가 주창한 복음적 가난이라는 이론을 질타했다. 수도단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난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초대교회의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4 피츠랄프는 이 용감한 주장 때문에 프랑스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에 소환되어 궁지에 몰렸다. 교황청 감옥에서 1360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돈과 명예를 바라고 민중에게 설교를 했고

자기 멋대로 성경을 해석했나니,

탐욕스런 욕망이 그러한 해석을 이끌어냈다.5

 

랭런드가 프랜시스수도단, 도미니크수도단, 갈멜수도단, 어거스틴수도단의 폐해를 비꼬아 쓴 시의 한 대목이다. 탁발수도사들의 활동이 세속화되고 본래의 의도에서 많이 떠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수도사들이 가난을 핑계로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2. 롤라드인들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롤라드(Lollard)의 어원은 중얼거리는 자를 뜻하는 중세기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이 용어는 경건한 체 하지만 이단성을 지닌 채찍질 고행자들, 베긴회, 프라티겔리파, 스웨스트리온파와 같은 집단을 지칭했다. 영국에서는 이단을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로마교회에 반항하면서 중얼대는 불평분자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중세후기 영국인들은 위클리프주의자들, 특히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신앙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을 경멸조로 비하하여 롤라드인들이라고 불렀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교회개혁을 외치는 공동체 형성에서 출발했다.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뒤 말년에 시간을 보내던 루터워드에서 옥스퍼드의 학자들과 사제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런던의 감독 코트니는 이 사실을 알고서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금하고, 옥스퍼드의 롤라드파 주요 인사들을 탄압했다. 이때부터 이 운동 가담자들을 롤라드인들이라고 불렀다.

 

롤라드인들은 학식 있는 자들, 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들, 교황과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화체설 교리를 비판하고 제도화 된 교회의 의식들과 교리들을 거만한 접신술(接神術) 또는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사술(邪術)로 여겼다. 로마교회의 사제의 부당한 학대에 울분을 품고 저항하는 자들,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주의자들도 있었다. 교구세금 상납을 거부한 신도들이 적극 가담했다.

 

롤라드인들의 활동 본거지는 여러 곳이었다. 옥스퍼드, 레스터(Leicester)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여러 곳에 산재했다. 레스터 지역은 롤라드 신앙운동을 환영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틀림없이 롤라드인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을 전했다. ‘청빈한 사제처럼 살았다. 탁발수도사와 마찬가지로 신발도 신지 않고 지팡이만을 짚고 둘씩 짝지어 다니기도 했다.

 

롤라드인들은 성경을 사랑했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위클리프의 서기 존 펄베이는 수많은 문서들을 참고하여 개정한 영어성경을 출판했다. 상당수의 롤라드인들이 나중에 로버트 반즈가 출판한 윌리엄 틴데일판 영어 신약성경을 구입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의 지도자 니콜라스 헤리퍼드는 불가타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헤리퍼드는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에서 롤라드인들의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서 로마교회의 성직자 계급에 대항한 위클리프의 사상을 소개하고 변함없는 지지를 표했다. 그 결과로 헤리퍼드와 옥스퍼드에 있던 모든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파문되고 추방당했다. 교회는 롤라드인들을 이단자, 이단자 위클리프의 추종자라고 비난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지하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롤라드 신앙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했다. 롤라드인들은 1395년경 영국의회 안에 막강한 세력을 확보했다. 교회개혁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12항목으로 정리하여 의회에 제출했다.

 

롤라드인들이 의회에 제출한 “12항목은 로마교회가 싫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마교회에 대한 영국교회의 복종, 화체설, 성직자 금혼제 등을 거부한다. 성직자의 도덕성 추락, 물질 신성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반대한다. 또한 성지순례, 형상, 예술품, 장식품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관심을 정죄한다. 고위성직자들의 세속적 직위와 지배활동, 성직자의 세속사 재판 활동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이 항목에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예식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교리는 옳지 않다고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6

 

흥미롭게도 “12항목은 설교자들과 국민들이 영어성경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롤라드 신앙운동의 교리적 기초는 위클리프가 천명한 신학적 주지들이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점차 자국어 설교와 토론 모임으로 전환되었다. 롤라드인들은 대중에게 설교할 때 영어를 사용했다. 현실감 있는 신학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토론을 했다. 신학, 교회론, 정치학에 대한 위클리프의 사상을 반영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옥스퍼드 시기(1378-1413)였다. 주요 인물들이 위클리프의 사상과 저작물을 중심으로 학문적 역량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차 조직을 강화하고, 의회에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문 “12항목을 제출할 정도로 발전했다.

 

영국의회는 1381년에 롤라드인들을 탄압하는 최초의 법률을 제정하고 추종자들을 검거했다. 옥스퍼드를 떠난 위클리프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설교했다. 영국의회는 1401년에 이단박멸정책을 반포하고 롤라드인들을 사형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국교회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감독 토마스 아룬델은 위클리프 사상이 설교에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고 위클리프주의의 확산을 억제할 목적으로 법령”(Constitutions)을 공표했다. 교회 권력자가 인정하는 자만이 설교를 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롤라드 신앙운동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점차 발전했고 구성원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롤라드인들은 헨리 5세의 집권 초기에 불운한 반란을 일으킨 존 올드캐슬 경과 불행한 인연을 맺었다. 올드캐슬은 1413년에 롤라드 신앙운동의 기본 신조에 동의했다. 그는 신앙 때문에 감금을 당했고 옥에서 풀려난 뒤 정부를 전복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다수의 기사들이 반란에 동참했고, 군사들이 런던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황은 역전되었고,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반란자 약 40명이 처형당했다.

 

두 번째 단계는 지하운동 시기였다. 정부는 1414년에 롤라드인들에 대한 종전의 법률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는 쪽으로 강화했다. 헨리 6세 집권 초기에 롤라드인들의 처형이 잇따랐다. 끈질긴 탄압이 계속되자 롤라드 신앙운동의 세력은 쇠퇴했다. 콘스탄츠공의회(1415)가 위클리프의 저작물이 담고 있는 신학적 주지들을 이단사상으로 정죄하고, 올드캐슬의 반란이 실패하자, 위클리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과 롤라드인들은 반역자로 낙인 찍혔다. 그 때부터 이 운동은 지하로 퍼져나갔다.

 

세 번째 단계는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민중 사이에 새벽별처럼 빛나는 신앙 형태로 존재하는 시기였다. 성직자를 반대하는 개혁 설교자, 선동가, 일반 시민들, 위클리프의 사상을 선호하는 옥스퍼드의 학자들, 학생들이 롤라드 신앙운동에 가담했다. 시골로 확산된 왈도파 운동과는 달리, 이 단계의 운동은 인구 밀집 지역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롤라드인들은 이단으로 지목받는 상황에서도, 교회의 성인숭배, 성직자의 부당한 수익, 성지순례, 형상을 숭배하는 관습 등을 비판했다. 위클리프의 정신과 열정을 따라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행태에 공분(公憤)하면서 교회 개혁을 촉구했다.7

 

롤라드 신앙운동은 사회적 취약성 때문에 결정력을 가진 종교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롤라드인들은 영국종교개혁 시기에도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 사회의 저변으로 확대되었고, 다가오는 영국교회의 개혁의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국가와 교회는 롤라드 신앙운동에 위협을 느끼고 나머지 박멸정책을 펼쳤으나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했다.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7장 제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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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olleg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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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도파가 신학교로 사용하던 건물, 피드몬트 산악지대(이탈리아 북부)   위대한 이단자 피터 왈도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 프란치스코는 2015년 6월 22일 12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의 왈도파 교회를 찾았다. 교회의 무자비한 핍박을 ...
    Date2020.05.24 Byreformanda Reply0 Views1195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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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아타나시우스 3: 월계관

    아타나시우스, 벽화 아타나시우스 3: 월계관   6. 사막의 수도사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가까운 사막에는 마귀, 맹수, 도둑이 들끓었다. 기도와 관상에 몰두하는 수도사들은 가혹한 자기 절제와 금욕생활로 영적인 순수함과 완덕을 추구했다. 자신의 ...
    Date2020.05.23 Byreformanda Reply0 Views46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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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아타나시우스 2: 이단의 술수와 반격

    여호와증인회(현대판 아리우스주의) 세계 본부 아타나시우스 2: 이단의 술수와 반격   아리우스는 니케아공의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서 재기를 꾀했다. 변방으로 추방된 뒤에도 감독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황제가 철학과 신학 논쟁을...
    Date2020.05.23 Byreformanda Reply0 Views593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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